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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May 09. 2016

생활여행기

스위스 베른 1

5월 스위스 베른의 전경

생활과 여행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다음 대화를 참조하고 싶다. 


남자친구가 살고 있는 스위스 베른으로 이사 온 지 이주일. 무직의 이십육 세 처녀가 장기간 합법적으로 지낼 방안이 (결혼 말고는) 없다는 절차 상의 문제로 인해 잠재적 불법 체류자의 신분, 귀국일 미정인 상태로 이곳에 온 지 2주가 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스위스 이민청에서 손에 꼽게 한국어를 하실 수 있는 분이 이 글을 아주 드문 기회로 행여 보시게 된다 해도 90일 무비자 방문이 가능한 쉥겐 조약에 스위스가 포함되므로 당장은 추방 명령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마 추방당한다 해도 나의 목적지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은 독일이 되겠지.)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함인지, 자기과시욕을 극복하지 못한 탓인지 도착일부터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스위스의 삶을 소셜 미디어에 줄기차게 공유하고 있던 요 며칠의 어느 날이었다. 몇 년 간 연락도 없던 지인이 갑작스레 나의 포스팅에 이 도시에 대해 알은체를 하며 반갑게 댓글을 달았고, 급기야 개인 메신저로 연락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베른에 작년 유럽 여행 때 들렀는데, 너무 좋은 나머지 이런 데선 누가 살까 했더니 우리 ㅇㅇ가 사는구나! 라며. 나는 그녀에게 살다 보니 나쁜 점이 더 많이 보인다며, 날씨부터 비싼 물가에 이르기까지 2주 동안 발견한 많은 불편한 점들에 대해 온갖 투정을 늘어놓았다. 아무튼 베른을 얼마나 여행했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하루라고 대답해주었다.

관광객/여행자들로 언제나 북적이는베른 구시가지

여행 중에 불한당을 만나도, 소매치기를 당해도 웬만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뭉뚱그려 좋은 추억으로 회자되기 마련이다. 여행을 위해 투자한 시간과 금전적인 요인을 차치하고서라도, 또 지나간 기억은 으레 미화된다는 시간과 기억 사이의 경험적으로 증명된 사실 이외에도, 여행이 이런저런 불만으로 점철되기 보다는 아름답게 기억되기가 쉽다는 데는 다른 요소가 있을 터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려 보자면 '여행의 무한 긍정'이라는 이 특이한 현상은, 여행 중의 '지금 그리고 여기'는 지나갈 시간이자 공간이고 여행 후의 '그때 그리고 그곳'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다 발견하게 되는 나쁜 상황들은 그저 아득한, 돌아오지 않을 무엇인 것이다.


하지만 이 생경한 (혹은 불편한) 여행의 요소들이 삶으로 들어오고 반복되기 시작하면 이는 더 이상 미화될 여행의 일부가 아니다. 내가 매일 부딪히고 경험하는 생활이 된다. 여행자는 서울의 반짝이는 거리와 수많은 인파를 메트로폴리탄의 압도적 매력으로 느끼며 감탄하고, 생활자는 야근으로 도시를 빛내고 출근길 수많은 인파에 압도(라고 쓰고 압사라고 읽는다) 당할 위기를 넘겨가며 서울에서의 매일을 사는 것이다. 이처럼 불편함이 삶으로 깊숙하게 들어오는 순간 생활이 되는 것이다.

뒷산 구르텐 언덕(Gurten hill)에 오르면 버젓이 보이는 알프스와 베른 생활자들    

스위스는 내게 이국이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는 영어를 사용해야 하고, 점원이 스위스-독일어로 대답해오면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채로 서있거나, 알아들은 체를 하거나, 민망한 얼굴로 독일어를 할 줄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다. 나와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을 하루에 한 번도 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며, 나의 언어로 소통할 때라곤 한국의 지인들에게 카톡을 보낼 때뿐이다. 그마저도 이곳에 저녁이 찾아들 때면 한국은 모두가 취침 모드를 켜둔 채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한참 꿈속을 헤매느라 바쁠 새벽녘인지라 황망하게 모니터만 응시할 뿐이다.

베른 구시가지

암묵적 영원이 약속되지 않은 도시에서 여행자도 아닌 생활자도 아닌 무언의 시간을 유영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자, 생활 여행자. 낯선 도시를 천천히 알아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내 삶의 궤적에 이들이 하나씩 추가되는 과정은 분명 여행과 수렴되는 부분이다. 오천 원에 달하는 버스 요금을 아끼고자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타는, 도착 후 외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불편함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것은 분명 생활이다. 


그래서 나는 생활여행 중이다. 생활과 여행의 중간 지점에서 애매하게 나를 생활여행자라 정의 내리는 것에 있어서 이 정도면 누구의 반박도 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연재는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며 다음 연재 국가가 어디가 될 지도 미지수다. 주제는 물론 여행과 생활에 해당하는 많은 이슈들이 다루어질 것이다. 이는 여행 정보와 팁과 같은 여행기부터 (국제) 연애, 문화에 대한 사담을 늘어놓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겠지. 좋은 책 읽기를 마치고 책을 덮을 때 몰려드는 그, 아아-하고 나오는 탄식!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글의 끝에 마음 한편이 두둑해지는 느낌을 받을 누군가를 위해서, 그리고 같은 감정을 느낄 스스로를 위해서 나는 생활여행기를 쓰고자 한다. 

베른 기차역 (Bern Bahnhof)
아레 강 (Aare River) 곰 공원 (Bärengraben) 주변의 전경  
휴일에 구르텐 언덕 (Gurten Hill)로 나들이 나온 베른 생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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