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매일 : 쉴트호른
밤공기에서 초여름의 냄새가 날 때. 비에 젖은 땅에서 시큰한 아스팔트 냄새가 올라올 때. 짧은 소매가 어쩐지 서글퍼질 때. 숨이 공기랑 닿으니 입김이 처음으로 생기는 때.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추위의 끝에 갑자기 두터운 코트가 왠지 답답하게 느껴져, 봄이라는 계절이 있었음을 매 해 새롭게 깨달을 때.
듣기 싫은 어른의 훈사를 도망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때처럼 마지못해 견뎌야 할 겨울 같은 계절에 앞서서는 기쁘지 못한 마음이, 한 벌씩 옷가지가 줄어드는 따뜻한 봄을 맞을 때는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계절을 맞이하는 자세 같은 것은 다 떠나서 일단 새 계절에 들어서게 되면 시작과는 다르게 계절에 따라오는 것들에 금세 익숙해져 버린다.
6월 초여름의 한 낯에 가장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면 아마, 오래 참을 수 없는 칼바람, 옷을 여미게 만드는 추위, 앞뒤 시야를 가려버리는 눈구름, 흩뿌리는 싸라기눈,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설경.
가장 예상치 못했던 여름의 정경이 스위스 쉴트호른의 꼭대기에 있다.
Bern - Interlaken Ost - Lauterbrunnen - Stechelberg(Schilthornbahn) - Mürren - Schilthorn
베른에서 출발한 우리는 인터라켄으로 가는 직행 열차가 바로 오지 않아 슈피츠(Spiez)에서 환승해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인터라켄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라우테르브룬넨 (Lauterbrunnen) 역에서 내리면, 다시 버스 141번을 타고 쉴트호른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 역 Stechelberg(Schilthornbahn)로 간다.
정상에서 내려와 라우테르브룬넨 역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를 택했다. 조금만 걷다가 버스를 발견하면 타자, 라며 들어선 샛길이었지만 나중에야 버스가 1시간에 한 대씩밖에 다니지 않는 걸 발견한 후에는 걷지 않을 수 없었으니 '택'했다고 하기에 조금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Stechelberg(Schilthornbahn) 케이블카 역 바로 주변에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막상 꼭대기의 전망보다도 장관이다. 한눈에 담을 수 없이 높고 큰 산맥들을 올려다보면 자연스레 겸허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열심히 사진으로 담아보다 역이 있는 방향을 향해 가꾸어지지 않은 흙길을 쭉 걸었다.
도보로 라우테르브룬넨 (Lauterbrunnen) 기차역으로 돌아가려면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하지만 산맥이 마을 양 쪽을 감싸고 있는 골짜기 형태의 지형인 이곳에서의 한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비록 우리는 이미 입장 시간이 마감한 때라 방문하지 못했지만, 첫째로 역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트뤼멜바흐(Trümmelbachfälle)라는 폭포가 있다. 융프라우요흐에서 빙하가 녹아 형성된 폭포로 산의 내부에 천둥처럼 포효하듯 쏟아져 내리는 장관으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가장 큰 지하 폭포라고 하니 입장 시간도 까맣게 모른 채 무작정 찾아간 과거의 내가 야속해진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 수많은 정보들이 범람하고 쉽게도 소비된다. 소셜 미디어 계정에서 사진과 짤막한 글로 구성된 형식의 콘텐츠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런 종류의 '이미지'야 말로 차고 넘치고 닳고 매일 먹어 삼켜진다. 아주 무성의하고 빠르게. 스스로조차도 하루에도 몇 번씩 소셜 미디어의 피드를 열심히 내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콘텐츠들을 빨리도 읽어내기에, 몇 시간이 소요되었을지 모를 누군가의 어떤 사진에 머무는 시간이 1초나 될까 싶다.
디지털 세대 특유의 시각적 감상에 대한 전반적인 무감각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인가. 끝없이 펼쳐지는 윈도우 배경 같은 자연경관을 계속 보다 보니 감흥보다도 저려오는 다리에 더 신경이 쏠리던 차였다. 마을에 어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슈타우바흐 폭포 (Staubbachfall Wasserfall)를 우연히 발견했다. 비구름이 조금씩 모습을 보이면서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할 때, 비바람을 헤치며 성산일출봉을 올랐던 작년을 상기시키는, 폭포로 향하는 수직의 계단을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가리킨다. '노'라는 대답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기대에 찬 얼굴을 실망시키기 싫은 마음과 웬일인지 모를 부지런함이 머리를 들었고 나는 지난 몇 주간 조깅으로 단련했던 체력을 무리하게 뽐내며 힘차게 계단을 올랐다.
전망대는 기껏 해봤자 비교적 가까이서 폭포를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란 나의 예상과 달리, 절벽 측면에 사람 다닐 길을 내어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뒷면에서 구경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전망대의 막다른 끝에 가까워질수록 비인지 폭포인지 출처를 모를 빗방울이 얼굴을, 온몸을 적신다. '비에 젖음=불쾌함'이거늘, 웃음이 절로 난다. 수직 하강하며 땅을 때리는 폭포수의 소리는 경쾌하고 힘차다. 폭포수는 지면과 닿으면서 경계가 보이지 않게 무한하게 수증기를 공기 중에 뿜어낸다. 뺨을 적시는 빗방울, 귓가에 울리는 폭포가 낙하하는 순간의 청량한 소리, 뿌연 수증기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 시각적 유희의 포화로 나른하던 내 온 신경에 촉각, 청각, 시각 세 감각이 한순간에 다 같이 자극되니 침대를 박차고 잠에서 깨는 느낌이다.
호기심이 많은 그의 권유를 게으름을 핑계로 '노'라고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이렇게 또 하나 늘어간다. 마법은 우리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영역의 밖에서 일어난다더니.(The magic happens outside of your comfort 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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