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테이블> 리뷰
*이 글에는 영화 <더 테이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난히 더운 여름, 끈끈한 땀과 피부 위를 떠다니는 열기로 녹은 아이스크림이 되어 사라질 것만 같은 날씨. 카페는 내게 피난처 같은 곳이었다. 팔만 뻗으면 필요한 것이 쉬이 손에 닿는 내 서재보다는 불편했지만 ‘빵빵한’ 에어컨 덕에 시원하고, 화장실 갈 때마다 테이블 위에 둔 컴퓨터가 없어질까 봐 불안했지만 말만 하면 음료를 준비해주니 편리하고, 시끄러워서 멍하니 화면만 응시하며 시간을 흘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살 것 같았다. 웅웅대는 음악 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왕왕거리는 목소리에 집중이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그곳에 인생이 있고 이야기가 있었다. 사람 사는 곳 같았다. 어느새 나는 옆 테이블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11:00 am
에스프레소, 맥주
왜 만났을까. 처음부터 궁금했다. 배우가 된 유진이 전 남자친구 창석을 다시 만난 이유. 그리고 창석이 유진을 다시 만난 이유. 전 ‘남친’과 전 ‘여친’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네가 대한민국 여배우 중 최고”라는 창석의 말에 “친구 맞네”라고 답한 유진의 마음은 ‘그렇다’이다. 유진은 친구로서 옛 추억을 되새겨보려는 의미로 이 만남을 약속했다. “우리가 친구는 아니었잖아”라고 응수하는 창석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창석은 유진을 친구로 만나려는 생각이 없었다. 소위 ‘잘 나가는’ 배우이기에 만나려 했을 뿐. 유진은 “여전히 새치 빼곤 안 변했어”라고 말하며 과거를 찾지만, 창석은 “넌 좀 변했어”라고 대꾸하며 유진의 현재에 집중한다. 아무것도 섞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유진은 자신의 속살을 솔직하게 내보이며 창석 앞에서 굳이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스타가 된 유진을 “맨정신에 못 보겠다”는 창석은 술의 힘을 빌려 가면을 쓴다. 목적이 다른 만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평행선을 긋는 대화의 끝에 다다르자 유진은 인정한다. “나 많이 변했어.” 성격도, 마음도. 창석의 전 여자친구 유진은 사라졌다. 아련한 추억을 함께 나누려던 유진은 예전 남자친구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배우로 돌아간다. 예의 친밀했던 관계는 이제 없다. 친밀했던 관계를 빙자한 알맹이 없는 가짜만 남아있을 뿐.
2:30 pm
커피 두 잔, 초콜릿 무스 케이크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색한 듯 눈을 피하는 경진이 ‘원나이트’를 보낸 사람치고 숫기가 너무 없다면 편견일까. 경진과 같은 커피를 시킨 민호는 장난기 섞인 대화를 휙휙 던진다. 매사 진지한 경진은 그런 장난기가 몹시 거슬린다. 갑자기 회사를 관두고 장기 여행을 떠난 민호가 경솔해 보이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서 원하는 일을 겨우 찾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짝짝이 신발 같다. 무엇보다 하룻밤의 일로 자신을 ‘쉬운’ 여자로 여길 것만 같은 민호의 깃털 같은 가벼움이 싫다. 계속 그 가벼움이 마음 한구석에 걸리적거려 “취업은 아무나 하나” 대신 걱정도 해 보고, 행여나 민호를 향한 마음을 들킬까 도리어 “제가 모르는 게 당연하죠. 세 번 본 게 다인데요”라며 빈정거린다. 가벼운 만남은 마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다가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경진을 붙잡는 민호는 품 안에서 손목시계를 하나 꺼낸다. 여행 내내 경진을 생각했다는 민호의 진심이 담긴 선물이 경진의 마음을 움직인다. 회사에서 갑자기 ‘잘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는 민호의 한 마디. 솔직함을 가벼움으로 덮어야만 했던 말할 수 없던 속사정. 그제야 얼음장처럼 차갑던 경진의 마음은 스르르 풀리고 문을 연다. 라면 말고 ‘파스타’ 먹고 가겠냐는 민호의 제안은 몸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진전이다. 진한 커피를 마시고 난 후 한 입 베어 무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무스 케이크처럼.
5:00 pm
두 잔의 따뜻한 카페 라테
묘했다. 결혼 사기를 계획하고 있는 은희의 말투가 유난히 사무적이었다. “법적으로는 아직 처녀”라는 은희가 이번에는 혼인 신고도 한다고 했다. 돈 많은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능력이 출중해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도 아니다. 이쯤 되면 귀를 의심하게 된다. 왜 진실은 늘 가난하고, 어렵고, 성실한지 모르겠지만, 은희가 계획하는 이번 결혼만은 진실이다. 엄마 역할을 맡아서 할 숙자는 부드러운 카페 라테에 각설탕을 넣고 빙글빙글 젓는다. 숙자의 손길이 복잡한 마음을 잠재운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각각 엄마와 딸을 잃은 은희와 숙자. 은희의 결혼 날짜와 숙자의 딸 기일이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숙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한다. 딸 결혼식에서 입으려 했던 그 옷을 꺼내 입겠다고. 그러자 은희도 흔들리지 않는 단호한 입술로 말한다. 어렸을 때 별명이 ‘느림보 거북이’였다고. 속마음은 각자 세상을 떠난 엄마와 딸을 떠올리며 복받치지만, 먹먹한 슬픔을 숨긴 채 서로의 마음을 토닥인다. 애잔한 둘의 관계가 지나치게 담담해 마음이 시리다. 피가 섞이지 않으면 가족이 될 수 없는 걸까. 숙자는 상견례 날 은희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엄마가 된다. 은희는 결혼식 날 숙자의 딸로 태어난다. 비록 꾸며진 관계지만, 우연이 빚은 관계지만, 이제야 인연을 만난 듯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 사는 맛이 있다.
9:00 pm
식어버린 커피와 남겨진 홍차
말 한마디에 책임이 실린다. “헤어지라 하면 헤어질게.” 혜경은 운철에게 마지막 기회를 던졌다. 그러나 운철은 선뜻 혜경에게 헤어지라고 하지 않는다. 책임을 질 용기가 없어서일까. “나 혜경 씨 못 먹여 살려.” 마음은 비록 낱낱이 뜯긴 꽃잎의 시체처럼 황량하지만,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운철의 얼굴 위로 유리창의 빗방울이 눈물처럼 쪼르륵 흘러내린다.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다. 결혼하기 전까지 만나자는 혜경의 제안에 운철은 끝까지 단호하게 거절한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혜경과의 이별에 갑자기 용기가 돋아나 차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지만, 그 차가 혜경과 결혼할 남자의 차라는 사실에 다시 뒷걸음질 칠 뿐이다. 마음이 간다고 그 길을 따라갈 수는 없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혜경은 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까. 그 괴리가 싫어 운철이 떠난다는 사실을. 용기를 잃어 식은 커피와 마음을 떠나보낸 찻잔 속 홍차가 서늘하다. 비가 갠 거리에 꽃잎이 날리면, 누군가의 눈에는 예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찢긴 마음 같아 슬프다. 왜 연애는 로맨스고 결혼은 현실일까. 마음과 현실이 한 길을 가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건 결국 자신이다. 즐거움은 이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