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립 Dec 24. 2019

차를 마시기 싫다는 건,
빵이 먹고싶다는 게 아니다

제 20회 서울여성국제영화제와 함께 한 영화 <녹이 슨>

"꽐라된 대학생 섹녀.avi"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우리 엄마의 핸드폰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런 제목을 단 스팸 문자가 왔다. 문자를 받을 때마다 엄마는 내 행실을 걱정했다. 행실을 똑바로 하라고 했다. 영상 속에 내가 있을까봐 무섭다고 했고, 친구를 만날 때마다 일찍 오라는 엄마의 전화가 왔다. 잘못은 유포시킨 그 사람이 했는데 왜 나는 범죄의 대상이 될까봐 하고 싶은 것에 제한을 받아야 되나.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고? 그러면 애초에 길에 똥을 안 싸면 되지 않나. 길에 싸지 마시고, 길에 싸는 사람을 나무라시라.


그 영상은 분명 동의 없이 찍히고, 유포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왜 여태까지 피해자의 행실을 지적하기만 했지 불법촬영을 해 유포시키는 가해자를 지적하지는 않았을까? 가해자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런 제목을 단 영상을 보내 돈을 벌 궁리를 하는데 피해자는 왜 언제 어디서 내 영상이 몰래 찍힐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내가 원하는 걸 하지 못하는 건지.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는 게 좋지만 그건 내 모습을 찍으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게 아니다. 이 둘은 다른 사실이다.


영화 <녹이 슨>은 불법 촬영과 유포에 대해 다룬다. 피해자가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들, 2차가해를 보여주며 피해자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한다. 여기에 더해 가해자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합리화 하려고 하는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 준다.


주인공 타티는 학교에서 간 여행에서 르네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 때 타티는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다. 그런데 다음날 휴대폰에 있던 타티와 전 남자친구의 영상이 유포된다. 타티가 전 남자친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영상을 스스로 퍼트렸다는 소문과 함께 영상은 전 학교로 퍼진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그녀에게 '잘 하던데'와 같은 발언이 따라 붙는다. 타티는 자살을 결심한다. 총을 들고 타티는 학교로 향한다. 하지만 그의 가방을 학교 경찰들은 검사하지 않는다. 여성 경찰은 섹스하는 영상을 스스로 유포시키는 그가 더럽다고 생각해 가방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성 경찰은 그가 섹스를 하는 사람이기에 본인과도 섹스를 하리라고 생각하며 이상한 눈길을 보낸다. 


타티에 대한 사람들의 발언과 행동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남성은 섹스를 하는 주체가 될 수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주체적으로 섹스를 원한다고 하면 발랑 까진 사람이 된다. 남성이 원할 때 아무때나 섹스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하려고 하면 '순진한 척' 한다는 말을 듣는다. 원치 않는 섹스를 하면 "그봐, 원했으면서" 라는 말이 나온다. 남성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남성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섹스를 하는 여성은 쉽게 성적 대상화가 되고, 조롱거리가 된다. 범죄의 대상이 되도 싸다는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타티는 영상과 함께 쉽게 섹스하는 여성이 됐고, 조롱해도 된다는 낙인이 찍혀 범죄로 부터의 보호라는 범주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외모를 꾸미는 건 어떨까. 화장을 하고 짧은 옷을 입으면 "보라고 그런거 아니냐"며 시선강간과 함께 외모 평가를 한다. 안 꾸미면 "왜 여자가 안 꾸미냐"고 한다. 이중잣대도 이런 이중잣대가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고, 내가 꾸미고 싶을 때 내 취향대로 꾸밀 것이다. 내 맘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은 알지도 못하는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다는 게 아니고,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암묵적으로 허락한 것도 아니다. 내가 한 때 사랑했던 사람과 영상을 찍었다고 그 영상을 유포시키는 것에 동의한 적은 없다. 이는 범죄고, 비난할 것은 가해자지 피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타티의 학교는 이 기본적인 것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타티의 자살은 기사화 된다. 기자는 "<항상 일어났던 영상 유포 사건>으로 한 여학생이 자살했다"는 멘트로 뉴스를 시작한다. 그렇다. 항상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바뀐 게 없다. 가해자는 잘 살고 있고 피해자만 고통을 받는다. 남성이 피해자였던 홍대 몰카 유출 사건에서 가해자가 검거되는 모든 순간 순간이 속보로 전해졌다. 여성의 피해 사례도 그렇게 속보를 내면 매 순간 속보 알림이 떠서 내 휴대폰은 불이 났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인영상 사이트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불법 촬영 영상이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오고 있으니까. CCTV에 찍힌 타티가 자살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기자에 의해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유포된다. 피해자는 죽는 그 순간까지 조롱과 유희의 대상이 된다.


영상을 유포시킨 것은 르네와 그의 사촌이다. 르네의 사촌은 '호기심'에 그랬다고 '누가 그럴 줄 알았냐'고 한다. 타티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르네에게 "영상이 유포되는 게 싫었으면 영상을 왜 보여줬냐"고 다그치며 그의 잘못을 합리화 하려고 한다. 여기에 르네의 아버지는 르네를 '보호' 하기 위해 르네가 타티의 영상을 유포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덮고, 경찰의 조사를 피하려고 멀리 여행을 떠난다. 그는 타티와 르네 모두의 담임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의 행동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피해자는 누가 보호를 해주나. 왜 피해자는 스스로 피해자임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되나.  


르네의 아버지와 이혼하고, 다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진 르네의 어머니와 타티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섹스가 필요하다. 아이를 낳기 위한 섹스는 올바르고, 장려될 일이다. 하지만 타티의 경우엔 다르다. 임신 없는 섹스는 방탕한 것이고, 책임은 여성이 다 져야 한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은 어디로 갔을까? 르네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비열하다"고 말하며 르네가 경찰에서 진술하도록 돕는다.


영화는 르네, 그의 사촌, 르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가해자 주변인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지 고민 해 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가해자를 옹호하지 않는다. 잘못임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있었다. 남성들에게 편한 사회가 맞다. 여성혐오라고 인식하지 못 하며 너무 쉽게 말했고, 너무 쉽게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남성들은 기득권이 맞다. 이를 인정 하는 게 우선이다. 가해자임을, 기득권임을 인정부터 해야 그 이후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사실 나는 아직도 가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내 섹스와 남성인 당신의 섹스는 다르지 않다. 내 섹스가 성스럽다거나 특별해서 원하는 사람과 했다고 모든 사람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영상을 찍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고, 찍은 영상을 찍었더라도 이를 퍼트려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건 호기심에 하는 일이 아니다. 범죄일 뿐이다.


나와 당신이 차를 마신다. 당신이 차를 마시기 싫다고 말한다. 그건 정말로 차가 마시기 싫다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입에 차를 들이 붓거나, 왜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차가 아니라 빵을 먹고싶다는 말로 생각해 빵을 주는 것 모두 문제가 있다. 차를 마시기 싫은 것은 싫은 것이고, 싫었다가 갑자기 마시고 싶어질 수도 있고, 마시고 싶었다가 마시기 싫어질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잘못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