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고, 원하는 걸 이룰 수도 없는데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힘들어하는 제게 제 친구가 해준 말입니다. 사실 도움이 안 됐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습니다. 저는 원하는 것을 향해 시간을 꽉꽉 채워 쓰는 것이 매우 중요했거든요. 그렇게 달리고 나면 뿌듯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삶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헤매고 무너지고를 반복할 때 저를 일으켜 세운 건 친한 친구의 격려가 아니었습니다. 저랑 친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길을 먼저 갔던, 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의 말이었습니다. 눈을 낮춰 어디는 일단 취직을 해야 되나, 내 인생은 그냥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싶을 때 “취준생한테 눈 낮추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말이 어딨냐”며 학교 선배가 툭 던진 말은 큰 이유 없이 위로가 됐습니다.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길에서 엉엉 울던 제게 “학생, 그러다 감기 걸려”라며 생면부지의 할머니가 건넨 말은 감기 걸리지 말고 툭툭 일어나야 된다는 힘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쓰러져서 두문불출하다 갑자기 나타난 저를 환영해준 건 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친하건, 친하지 않건 상관없이 사람들 속에서 저는 일어나고 삶을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가 이사가는 모습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강말금)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찬실이를 보며 저를 발견했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모습을 언뜻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실은 영화를 만드는 PD로 10년 넘게 지감독 작품만을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평생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감독은 새 작품을 찍기 바로 전 과음이 빚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뜹니다. 이에 영화사 대표는 “찬실이가 아직 현실을 모른다니 안타깝네. 그 영화를 만드는데 우리는 지감독이 필요했던 거야. 찬실이같은 PD가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영화였다구.”라며 같이 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흔, 사회가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할 수도 없고 적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때. 그 때에 일을 잃고 생각할 시간을 얻은 찬실은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합니다.
# 그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찬실과 지켜보는 장국영
찬실은 집이 없어 산꼭대기 할머니(윤여정)의 집에 세를 들어 살기로 합니다. 그 집에서 만난 귀신 장국영(김영민)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숙제를 줍니다. 찬실의 친한 친구인 배우 소피(윤승아)는 “나는 그걸 깊이 생각해봐야 될 것 같은데 그러질 못하는 게 더 고민이야”라고 말합니다. 찬실은 십 년간 못한 연애를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쓸데없는 고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교차하지만 일단 연애에 발을 들여 보려고 합니다. 잘 되지 않았고, 이에 장국영은 “외로운 건 사랑이 아니야. 다 가지려는 것만 버리면 얼마나 편한데”라는 말로 찬실 자신에 대해 더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고민 끝에 찬실은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동안 쌓아둔 영화 관련 물품을 정리하는 찬실을 보며장국영은 눈물을 훔치고, 할머니는 “버리는 게 있어야 채우기도 하지”라며 격려해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도 꽃처럼 돌아올 수 있으면 좋을텐데”라며 영화를 하다 먼저 죽은 딸을 그리워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지나간 시간들이나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써버린다고 해도 이 시간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기도 하죠. 이 말을 듣고 찬실은 눈물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버리려고 했던 영화 물품들을 들여옵니다.
제가 무언가를 준비하려고 했던 시간들, 꿈을 포기했던 경험, 다시 시작했던 일들이 모두 생각나며 찬실과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흔한 말이기도 한 “사람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잘 지키고 있는 삶의 모토는 ‘지나간 일 후회하지 말자’입니다. 물론 제가 했던 행동이 ‘부끄러워서’ 이불킥은 많이 하지만 돌아가서 이렇게 했을 걸이라고 ‘후회’는 잘 안하거든요.
특히 제 삶의 방향이나, 무언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더 그렇습니다. 그 때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이유로 결정을 내린 나 자신을 더 존중해야 지금 결정을 내리는 나 자신도 존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때의 이유는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특히 사람이 보낸 시간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도 않고 돌아온다고 해도 마음만 더 힘들게 할 뿐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계속 살아가면 되는 것이죠.
# 나도, 찬실이도, 당신도
한글공부를 하는 할머니와 찬실
집주인 할머니와 찬실이 콩나물을 다듬으며 대화하는 장면도 마음에 여운을 주는 것 중 하나입니다. “하고 싶은 것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말하는 찬실에게 할머니는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어. 대신 애써서 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왜 사는지 생각하며 살면 죽는 것밖에 답이 없다’라는 친구의 말이 겹쳐 들렸습니다. 삶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목표만 보고 산다면 죽지 못해 사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 내가 원하는 걸 해냈다면, 그것만으로도 날 아껴줘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쌓이다 보면 큰 행복도 되고 작은 행복도 되고 죽이든 밥이든 뭐든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찬실은 더 나아갑니다.
“내 인생을 계속 채우려고 했는데 일로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게 있더라구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그냥 살아보려구요”
하나만 바라보며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천천히 살아나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 영화든, 취재든, 연기든, 친구든 무언가로 색을 입혀나가는 것. 그런 마음가짐이 제게도, 찬실에게도 더 필요하다는 걸알게 됐습니다.
# 엔딩: 그냥 살아나가면 되는 것
"하늘에서 응원할게요" 꼭 안아주는 장국영
찬실의 방에 소피를 비롯한 친구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방에 전구가 나가서 다 같이 사러 나갑니다. 캄캄한 밤이지만 함께 손전등을 들고 길을 찾아나갑니다. 이 장면은 앞이 캄캄하고 어려울 때 주변 사람이 힘이 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가는 길에 본 밝고 둥근 보름달에 찬실은 소원을 빕니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찬실이는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을까요? 다 이뤄지라고 했을까요,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했을까요, 다른 어떤 말이 들어갔을까요?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요? 찬실을 일으켜 세운 건 생면부지의 집주인 할머니와 장국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어선 찬실을 받아주고 다시 함께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친한 친구들이었죠.
영화는 여기에 한 가지 장면을 더 보여줍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하얀 눈밭으로 나가는 열차를 보여주는데요. 이것은 갑자기 스크린으로 바뀌고 장국영이 이 영화를 보고 박수를 치며 나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삶에 발을 철퍼덕 담그고, 살겠다고 열심히 첨벙첨벙 하기보다 조금은 여유롭게 그냥 살아나가면 된 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앞으로 찬실이가 좀 더 괜찮은 삶을 살게 됐다는 단순한 비유일 수도 있겠지만요.
# 아쉬운 점
삶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건 장점입니다. 거부감 없이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아쉬운 건 그 분명한 생각들이 명언 남발로 이어져서 감동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나 방정환 선생의 글귀를 읽는다거나 하는 뻔한 말들은 오히려 감동을 해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뻔한 이야기고, 충분히 예상 되는 것들이지만 찬실의 행동에 함께 웃고, 울고, 이불킥할 수 있게 하는 따뜻한 영화인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