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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Mar 30. 2020

추억 코팅

“아빠가 열심히 일해오신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거야”


엄마는 가끔 아빠한테 극존칭을 쓴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출근 전 식탁에서 신문을 읽으며 연말정산이니 재난기본소득이니 하는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아빠 소득을 알게 됐는데 생각보다 많아서 “아빠 돈 그렇게 많이 벌어?”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가 저런 말을 했다.


아빠가 진짜 많이 버는지, 열심히 일해 왔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열심히 일한다"는 말이 너무나 불공정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가끔 책상머리 앞에서 졸았어도, 지각이나 실수가 잦은 시기가 있었어도, 술 마시느라 돈을 펑펑 써도 다 퉁 칠 수 있을 거다. 정규직 회사원의 삶을 지금까지 이어왔으니까. 아빠가 과연 지하철이 끊기지 않은 시간에 대리를 부르거나 택시를 탈 때 죄책감을 느꼈을까? 아빠의 삶은 아름답게 코팅될 수 있다. ‘열심히 일한’ 삶으로.


그러나 엄마의 삶은 어떤가? 네 가족의 ‘집에서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진 엄마. 엄마는 자기가 아빠의 회사 노동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결코 내세우는 일이 없다. 오히려 엄마는 자신의 노동을 후려친다. 그게 미덕인 양. 가끔 낮잠을 자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자신을 더 부각하면서, ‘열심히 일해 온’ 자신을 지운다.


실제 삶이 도화지 재질이라면 엄마 화법 속에서 아빠는 실크고 엄마는 사포다. 어떤 삶이 그렇게 매끈하며, 어떤 삶이 그렇게 거칠단 말이야.


내 수험 생활도 떠올랐다. 합격하자마자 나를 포함한 여러 이들의 화법 속에서 그동안의 나날이 ‘실크’가 됐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더니 됐구나. 이럴 줄 알았다. 결국 이렇게 되려고 그 시간을 고생한 거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신문을 거들떠도 안 보던 날들이 있다. 술 먹고 자빠져서 포카리스웨트를 마시며 넷플릭스만 보던 낮도 허다하다. 누구한테 보이기도 창피한 글들이, 아니 마감에 맞춰 글을 쓸 시도도 하지 않은 시간이 수두룩하다. 치열하게 사는 게 뭔지는 지금도 절대 모르겠는데 합격으로 인해 과거가 그런 것처럼 코팅되는 게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똑같은 날들을 보냈음에도, 만약 떨어졌다면 내가 무기력하고 방탕했던 낮과 밤들을 얼마나 탓했을까.


아름다운 추억이나 공치사가 모두 현재의 문제, 권력의 문제처럼 보인 하루다. 무용한 날들이 없었다는 말, 모든 이에 감사한다는 말이 차라리 더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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