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잘 훈련된 '서비스'
영화 <아노라>는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애니(러시아 이름: 아노라)'가 러시아 재벌가의 아들 '이반'과 얽히고 섥히다 어쩌면 자신이 외면해 온, 슬픈 현실을 맞딱드리게 되는 영화다. 선정적인 시퀀스로 시작하고 코미디로 전개되다 리얼리즘 드라마로 끝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자체로도 훌륭했던 영화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아노라>를 위한 습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결말 시퀀스에서도 나오지만 '아노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석류', '빛', '밝다'이다. 석류처럼 새초롬하고 알알이 빛나는 이름의 의미처럼 애니는 항상 웃고 스트립 바의 에이스가 될 만큼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애니의 삶은 일터와 집 뿐이다. 그런 애니가 이반을 만나면서 이반의 집과 친구들의 가게에서 놀며 삶을 확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반이 러시아로 떠나기 일주일 전 함께 있는 조건으로 1만 5천 달러를 받기로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애니와 이반이 함께 지내는 모습은 조건부 만남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반의 재력을 백으로 삼아 매일 파티를 벌이고 베가스에 가고 싶으면 베가스에 가는 이들의 삶은 무서울 게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즐거움은 전화 한 통화로 균열이 인다. 이반은 도망가고 애니는 자신을 협박하는 아저씨 셋과 어색한 동행을 한다. 이반의 부모와 오랫동안 일하며 이반의 뒤치닥거리를 해왔다는 '토로스', 토로스의 동생이자 일 처리를 하는 데 크게 도움은 안 되는 '가닉', 그리고 이들에게 고용된 30살 청년 '이고르'다. 이반이 도망치고 이반의 집에서 대치하는 애니와 이들은 이반을 찾아다니면서도 역시나 대치한다. 영화는 애니를 바라보는 이고르의 모습을 종종 담는다. 자신을 변태 깡패로 보는 애니에게 사과하고 싶고 실제로 시도는 하나 실패하고, 애니에게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으면서도 불안해보이는 애니의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고르의 시선은 동정이나 연민처럼 느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애니를 안타깝게 보게 한다.
갈만한 곳은 죄다 뒤져도 없던 이반은 찾아다닌 노력이 무색하게도 애니를 처음 만난 스트립 바에서 발견된다. 애니는 자신을 시기하던 다이아몬드와 이반이 같이 있는 건 고사하고, 이반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과 함께 이 상황을 해결하길 바란다. 하지만 이반은 숙취로 정신이 없고 숙취가 풀리고서도 애니는 외면한 채 엄마의 품 속에서 머리를 부비며 엄마 재킷의 브랜드를 맞추려 든다. 반면 애니는 러시아어로 정중하게 이반의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부모로부터 모욕을 당해도 자신과 이반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반이 직접적인 말로 현실을 깨우치기 전까진. 애니는 둘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은 오해로 인한 공작이며 당사자의 마음만 통한다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애니에게 잘 있으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던 이반, 도망갈 만큼 두려워하는 부모가 온다는 데도 술에 절어 클럽을 전전하다, 자신을 유혹하는 다이아몬드에게 사랑한다며 고백하는 이반의 모습을 본 관람객으로서, 애니가 이반을 놓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애니는 이반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인정 한다. 이반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구실로 변호사를 선임해 고소를 놓겠다 맞장을 두기도 하고 자신을 창녀로 보는 이반의 부모에게 부모를 엿 먹이기 위해 자신과 결혼한 아들은 잘한 거냐라고 따지고 들기도 한다. 이반이 실종되기 전까지만 해도, 애니는 이렇게 당당하고 여유로웠다.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운 좋게 만난 재력가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 여주인공이 그렇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려 부정하다 끝내 속 시원히 인정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범죄, 로맨스, 블랙 코미디의 형식을 띠며 힘차게 이야기를 몰아온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로 하여금 이제까지 봐온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토로스로부터 빼앗긴 결혼 반지를 몰래 빼내어 자신에게 다시 돌려주는 이고르에게 애니는 느닷없이 이고르의 차가 이고르와 닮았다고 이야기하며 스트립 댄서로서 일하듯 그의 위에 올라탄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애니에게 이고르는 진짜 사랑에 빠진 듯 서서히 키스를 하려고 하는 그때, 애니는 머뭇거리며 이고르를 밀어내다 눈물보가 터진다. 신나는 팝송과 선정적인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눈물이 터진 애니와 말없이 애니를 토닥이는 이고르의 장면을 끝으로 어떤 소리도 없이 막을 내린다. 한 어른으로, 개인으로 잘 살기 위해 실수 하나 없이 신경을 곤두세웠던 아이가 무너진 것처럼 우는 애니의 모습이 애처롭다.
영화 <아노라>의 인상 깊은 점은 청년의 젊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생생함이 결론적으로는 기성세대(한편으로는 권력)의 손바닥 안에서 이뤄지고 있을 뿐이며 기성세대가 주먹만 움켜쥐면 청년은 옴짝달싹 못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장르의 장점만 뽑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반은 직접 찾아온 부모의 뒤를 군말없이 동행하고, 애니는 결혼 취소 서류에 사인을 하며, 이고르는 시키는 대로 애니를 붙잡고 사탕가게를 부순다. 21살의 이반, 23살의 애니, 30살의 이고르. 각기 다른 가정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는 이들은 분명 열심히 살고 있지만 무력해보인다. 얼굴 주름이 자글거리는 할아버지의 젤리 가게에서 일하는 이반과 애니의 친구도, 노인들의 댄스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또 다른 친구도, 애니를 질투하는 다이아몬드도 모두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하지만 이들의 삶이 필 거 같아 보이진 않는다.
열심히 일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현실은 별개였다.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관계는 처절해서 웃기고 동시에 서글프다. 누군가의 대부가 될 만큼 16살 때부터 열심히 일해오며 명망을 갖춘 아저씨 토로스, 그런 형 밑에서 수발을 들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닉, 할머니와 둘이 살며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이고르, 그리고 협의 하에 얻게 된 행운을 지켜내려는 애니 이들 모두 나름대로 잘 살기 위해 애쓸 뿐이다. 모두 다 같이 잘 살면 좋으련만, 이들 중 누구도 미워할 수도 없어 울적해진다. 이번 포스팅은 선 베이커 감독 특유의 미쟝셴이 돋보이는 장면 중 아래 장면을 마지막으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