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안다. 사람들이 카밀과 나보다는 미루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걸. 카밀과 나야 우려먹을 대로 우려 마신 티백처럼 나올 게 뭐가 더 있겠나? 반면 미루는 ‘과연 요 녀석, 어떻게 클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다.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고 싶은 분도 계실 거고, 조금은 독특한 유년 시절을 보낸 미루의 바른 성장을 응원하는 분도 계실 거다. 장점은 모습을 드러내는 데 오래 걸리지만 단점은 바로 나타나는 법. 그래서 여행 중 교육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홈스쿨링 해요'라고 답하면 왠지 어깨가 조여지고 긴장이 됐다. 바로 판단의 시선이 느껴지니까.
선택이든 아니든 학교를 보낼 수 없는 여행의 상황에선 카밀과 내가 어떤 형태로든 미루를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홈스쿨링'을 검색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질려버린다. 놀이 위주로 흥미를 자극해야 한다'고? 창의력을 발휘할 자기 주도적 커리큘럼을 만들어야 한다고? 칫, 누가 그걸 몰라서 이렇게 검색하나… 혼돈 속에 머릿속만 뿌옇다가 결국 에라, 밥이나 먹자며 컴퓨터를 닫는다. 금강산도 식후경. 미루야, 배고프다! 우리 국수나 먹으러 가자!
2020년 초 코로나가 퍼지기 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ka)란 도시에서 지낼 때 카밀과 미루는 아침마다 시끌벅적 전쟁을 벌였다. 카밀이 네덜란드의 기초 교육 과정이 담긴 유료 교육 앱을 미루에게 시켰는데, 미루가 그걸 아주 싫어한 거다. 요리조리 도망갔고 그러다 잡히면 하기 싫다며 악을 썼다. 난 그 난리가 싫어서 적당히 좀 하라고 했지만 카밀은 최소 기본은 해야 한다며 단호했다. 어? 이 양반 의외네? 마냥 놀릴 것만 같더니, 아니었어? 그런데 학교 과정을 그대로 할 거면 왜 홈스쿨링을 해? 난 여행 자체가 학교라고 생각하는데. 왜 배워야 하는지 그 이유와 즐거움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될까? 아니라고? 다 때가 있는 거라고? 내가 너무 세상 물정 모르고 ‘이상적인 얘기’ 같은 소리만 하고 앉아 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같은 아이는 하나도 없고 그 많은 교육 방법 중 우리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어떻게 적용할지 결정하는 건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세상에, 이렇게 무지막지한 책임이라니! 인류는 지금까지 어찌 이런 책임을 짊어지고 왔단 말인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싶다. 으아악!
그렇게 전쟁을 치르던 어느 날, 정확히 말하면 2020년 2월 18일, 태어난 지 7년 하고도 45일째 되던 날. 미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 배우고 싶다고 했다. 배우고 싶은 거 없냐고 물을 때마다 시큰둥하게 '그냥 놀게 냅둬' 라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봐! 기다리면 된다니까! 난 호들갑을 떨었다. 뭐였냐고? 바로 피아노. 딸 가진 엄마라면 으레 한 번쯤 동네 학원을 기웃거렸을 바로 그 피아노. 난 얼씨구나 검색했고 숙소 근처의 학원에서 4회 레슨을 끊었다. 선생님은 여행 중인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4일 연속으로 레슨받도록 조절해 주셨다. 교재도 샀고 숙제도 했다. C=도, D=레, E=미, F=파, 높은음자리, 낮은음자리. 평소와 달리 의자에 궁둥이 붙이고 숙제하는 미루의 모습에 오호라, 요 녀석, 이거 말레이시아에서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거야? 제2의 조성진 나오는 거야? 라며 괜히 부풀었다. 하지만 싱겁게 끝난 마지막 레슨에 살짝 김이 샜고, 미루의 속마음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 미루야, 피아노 재미있다고 했잖아. 재미있으면 더 배울까?
- 더? 4번 한다고 했잖아. 4번이면 됐어.
- 뭐? 됐다고? 4번이면 됐다고?
- 응. 됐어. (씨이익~)
4번이면 됐다니! 할 만큼 했다는 거야? 이누마! 그렇게 웃고 끝낼 게 아니자녀어어~! 고작 4번 하려고 150링겟(한화 약 5만 원)을 낸 줄 알어어? 이건 경우가 아니자녀어어~!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루는 놀이터 잔디밭에 벌러덩 눕더니 말레이시아의 뜨거운 태양을 즐기며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아이의 머릿속엔 말로 다 못 하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어떤 형태로 응축되어 있을까? 아무리 엄마라지만 난 이 녀석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다음 날에도 카밀과 미루의 전쟁은 계속됐고, 우린 말라카를 떠났다.
4번이면 됐다는 만 7살 아이의 판단을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생각했던 만큼 재미없었을 수도 있고 어려워서 겁이 났을 수도 있다.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대처하고 극복하는 마음은 한순간에 배울 수 없기에 아쉬웠지만 난 미루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삼장법사의 손가락 끝을 벗어나지 못한 손오공처럼 미루 손바닥에서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당분간 미래의 조성진은 미뤄두는 걸로.
이른바 '홈스쿨링'이란 이름 아래 아이에게 자율권을 주네 마네 하지만 '야, 너 나중에 나한테 고맙다고 할걸!'이라고 말할 유혹은 참 많다. 하래서 했는데 하고 보니 좋아서 자신의 길이 된 케이스는 수두룩하니까. 바로 이게 부모가 가지는 근본적인 두려움일 거다. 아이의 재능을 발견할 기회를 놓치거나 모르고 지나치는 건 아닐까, SNS에 올라온 내 친구 아이들은 잘만 피아노치고 잘만 바이올린 연주하고 잘만 발레 하던데, 내 아이는 어쩌지? 하는 두려움.
현재 만 9살인 미루는 한국의 학교보다 느슨한(?) 커리큘럼을 가진 네덜란드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첫 등교를 앞둔 전날 밤, ‘학교에 가고 싶어 기다릴 수가 없다!’고 난리 쳐서 홈스쿨링을 주장했던 카밀과 날 허무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홈스쿨링은 개뿔! 미루는 산수에는 약하지만 (이건 왜 날 닮은 건지!) 읽기와 쓰기는 잘한다. 아빠와 함께 시 낭송을 즐기고 그림 그리기와 인형극 하는 걸 좋아하며 하교 후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걸 좋아한다. 여느 아이처럼 친구 때문에 속상할 때도 있고 학교가 싫어질 때도 있다. 따로 시키는 과외는 없고 일주일에 한 번 스카우트에 간다. 비록 덧셈 뺄셈은 서툴지만, 빨간펜 선생님도 없고 학습지 하나 안 풀지만, 만사가 그저 재미있다는 만 9살 아이의 교육 환경에 난 지금 딱히 불만이 없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계획할 때 미루의 학교와 친구 관계는 여행의 지속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모든 건 열어둔다. 미루가 학교를 계속 좋아할지 장담할 수 없고, ‘로드 스쿨라’라고 불리는 길 위의 학교에서 홈스쿨링으로 배움을 연장하는 게 과연 최고의 선택인지도 잘 모르겠다. 훗날 미루가 ‘그때 그렇게 했던 엄마 아빠의 결정에 감사해요’라고 말할까? 그래도 난 여전히 기다리려고 노력한다. 홈스쿨링의 힘을 믿더라도 교육엔 결코 정답이란 없으니, 계속 질문하고 마음을 열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설사 그게 여행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미루 말대로 4번이면 되는 것도 있는 거겠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던 그날, 미루는 이 말도 했다. 커서 농부가 되고 싶다고.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항상 시큰둥하게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데.'라고 했던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후로 장래 희망은 계속 변한다. 얼마 전엔 호텔 매니저가 되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농부는 일이 너무 많은 거 같다면서. 허허허… 제2의 조성진은 없는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