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저주와 글과의 밀당
- 기다림의 저주와 글과의 밀당
3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을 때 우리가 선택한 첫 행선지는 필리핀의 세부(Cebu)였다. 카밀이 비자 갱신을 위해 3개월마다 갔던 여행 중 가장 좋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밤 11시 50분이라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막탄(Mactan) 세부 국제공항의 출입국 심사대 앞에는 공유를 쫓아가는 부산행 좀비만큼 엄청난 인파가 구불구불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심사를 보는 검사원은 단 4명뿐. 급한 한국인 성격상 아저씨 한 분쯤은 ‘여기 관리자가 누구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일 처리가 뭐 이래!’ 하며 버럭 화를 내지 않을까 했지만, 분위기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카밀과 난 ‘저 깡마른 러시아 남자는 왜 히틀러 머리 스타일을 했을까?’ 같은 사람 구경으로 시간을 메꾸려 했지만 이내 지루해져 그냥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거나 멍만 때렸다. 미루는 과감히 줄에서 탈출해 처음 만난 다른 아이들과 쎄쎄쎄를 하며 놀았다. 2시간 반 이상의 시간 동안 줄은 천천히 줄어들었고,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검사원의 얼굴은 의외로 친절했다. 그리고 심사는 단 몇 분, 아니 몇 초 만에 끝났다. 거침없이 쾅쾅 도장을 찍고 건네는 여권을 받으며 검사원에게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 들던 생각은 이거였다.
- 기다림의 마지막은 항상 이렇게 허무한 건가?
심사대 앞에서 이렇게 오래 기다린 건 여태껏 여행하며 처음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여행길, 꽤 멋진 기록을 남겨보리라 결심한 난 보고 느끼는 것이 넘쳐서 글이 술술 잘 써질 줄 알았다. 얼마나 할 말이 차고 넘칠까? 사람들이 ‘재 왜 저래?’ 하며 질릴 때까지 주야장천 뭔가를 써서 SNS에 올리겠지? 하지만 여행의 시작을 기다림으로 열어서였을까? 글은 내게 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지난 3년간 지극히 잔잔한 일상의 물결 속에 있다가 갑자기 몰아치는 여행의 거친 파도 속에 있자니, 한꺼번에 밀려오는 감정과 보고 느끼는 것들에 압도되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접하는 동남아 국가의 적나라한 가난은 억눌려 있는 내 냉소의 고개를 다시 들게 했다. 제대로 된 인도가 없어서 편하게 길을 걷기가 어렵거나,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와 엉망인 배수 시설을 목격할 때, 새삼 한국의 시스템이 그리워지고 그동안 내가 너무 편하게 살았다는 걸 자각했다. 예전엔 동남아의 이런 모습을 혼란 속의 질서, 더러움 속의 역설적 아름다움, 낡은 것의 미학 등을 씨부리며 낭만화했지만 이젠 그게 안 됐다. 꼴에 머리 좀 컸다고 정치적 타락과 구조적 모순과 노동자 계급의 고통이 보였다. 오성급 리조트의 바닷가에서 금빛 석양을 보며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잔하는 여유를 부리면 좋으련만 그런 편한 여행은 우리가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이 불편한 여행을 슬기롭게 즐기기에는 내 지식과 사유가 너무 얇았고, 설상가상으로 여행 글을 올리는 SNS도 시큰둥해졌다. 소통이 목적이라지만 몇 페이지의 글을 이미지 하나로 퉁치는 과시와 관음의 복합체인 이곳에 글을 올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난 말이 없어졌다. 표현하고 싶어서 안달이 아닌, 조용히 내 여행을 내 안에서 꼭꼭 씹은 다음 삼키고 싶었다. 그래야 배탈이 안 날 것 같았다. 뭐든 차고 넘치면 탈인 법이니까.
사실 여행하며 쓰는 글은 제때 써야 하는 법이다. 제때 쓰지 않은 글은 수천 장 찍고 정리하지 않은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 카드와 같다. 밀리면 감당이 안 되고, 결국 스트레스가 되어 손을 놓게 된다. 난 언젠가 정리하리라 다짐하며 순간순간 느끼는 걸 놓치지 않기 위해 짧게나마 메모를 했다. 하지만 이 메모들을 제대로 사유하고 정리하려면 커피 한 잔과 함께 멍하니 창밖을 보는 여유가 필요한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매일 하는 이동과 여행의 고단함, 카밀과 미루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시간 자체의 피곤함에 곯아떨어지다 보면 ‘여유’라는 단어는 듣도 보도 못한 외계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길 위에서 쓰는 글은 필연적으로 기억에 의존하는 글이 되나 보다. 난 그 기억을 잘 보관하기 위해 최대한 느리게 여행했고 내 기억 창고는 언젠가 정리를 기다리는 메모들로 가득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더는 여행을 할 수 없는 지금, 이젠 계획을 잘 세우면 정리할 여유를 만들 수 있다. 끄적였던 메모를 하나씩 꺼내 보며 그래, 그때 이랬었지, 하며 그 상황을 시뮬레이션한다. 복잡한 감정도 웬만큼 소화가 됐고 그렇게 간절했던 여유도 있으니, 그렇다면 이론상으로는 글이 잘 써져야 한다. 안 그래? 하지만 세상사 하나도 쉬운 게 없으니, 이래도 안 써지고, 저래도 안 써진다. 참나,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심술쟁이 글 같으니라고.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난 기다렸다. 메모는 글이 아니기에, 글이 내게 제대로 올 때까지. 사실 언제 올지도 모르고, 솔직히 말하면 왜 기다리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세부 공항의 저주는 이 기다림을 잘 버티라고 던진 경고였을까? ‘기다림’을 생각할 때마다 난 자연스레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떠올린다. 고도 씨가 누구인지, 그에게서 뭘 원하는지, 왜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마냥 그를 기다리는 에스테라공과 블라디미르. 고도 씨와 이 둘의 관계는 나와 글의 관계와도 같다. 글은 내게 하염없이 기다려도 오지 않은 ‘고도 씨’다. 극 중 뜬금없이 등장한 양치기 소년은 그 둘에게 ‘고도 씨는 오늘 오지 않아요. 내일 와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내게도 적용된다. 오늘 오지 않은 글이 내일 올까? 떠나자고 말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 에스테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오늘은 꼭 글을 쓸 거라고 말하지만, 키보드 위의 내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글과의 밀당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순순히 와줄 때도 있고 엄청난 갑질을 할 때도 있다. 을의 위치에 있는 난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마침내 온 글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글이 불성실한 태도를 보일 때도 있고, 메모는 과부하가 된 지 오래인데 당최 올 생각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확 짜증이 나서 칫, 될 대로 되라지! 내가 뭐 글 못 써서 환장한 사람이야? 글이고 나발이고 그냥 미뤘던 드라마나 보자고! 하며 반항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게 있다. 나는 왜 글을 기다리는 걸까? 오랜 기다림 끝에 도장 쾅 하나로 끝나는 세부 공항 같은 허무함도 싫고, 왜 기다리는지 본질적 이유조차 모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테라공은 한심하기까지 한데, 왜 난 이 못되기 그지없는 글을 기다리는 걸까? 그건 아마도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내 여행의 메모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기 위해서일 거다. 동남아의 가난을 보며 끄적였던 내 메모들이 하나의 스토리, 즉 서사로 형태를 잡지 않는 한 이 메모들은 그저 ‘나 여기도 가봤다!’라고 자랑하는 한낮 허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올 듯 안 오는 얄미운 고도 씨처럼 오늘도 안 오고 내일도 안 올지라도 난 기필코 내 여행의 스토리를 찾아야 한다. 코로나 19 때문에 ‘기다림’이 사는데 기본 미덕이 된 지금, 결국 지금껏 주저리 늘어놓은 모든 말들은 이 한 문장을 위해 썼다. 내가 글을 기다리는 (혹은 쓰는) 이유는 한순간 방심하면 반딧불처럼 반짝하다 사라지는 내 여행의 스토리를 붙잡기 위해서다.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그림 by 옐로우덕
<그동안 '시시껄렁할수록 심오한 여행의 잡설' 매거진과 '시시껄렁할수록 심오한 오늘의 잡설' 매거진에 있는 글들을 하나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판데믹 시대에 '노마드'로서의 정체성을 정리하고자 함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겠죠? 정리가 되면 다른 매거진에 있는 기존 글은 발행을 취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