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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Sep 12. 2022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11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11일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11


2022년 9월 11일


생각해 보니, 얼마나 대단한 일기를 쓰고 싶었길래

어제 짧게나마 일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일기는 쉽니다’라고 마감했을까?

도대체 무슨 얘기를 써야 제대로 된 ‘일기’가 되는 건지 원...

슬슬 매일 쓰는 게 부담으로 다가오는데

그저 평소 내 의식의 흐름 끝자락을 잡는 것뿐이니

기똥찬 글 쓰려는 욕심 부리지 말고 짧게라도 쓰자.

최소 9월 한 달은 빠지지 말고 쓰자.

그리고 9월 31일에 스스로 칭찬하는 의미로 스시를 사 먹자.

그럼 10월에도 계속 쓰고 싶을지 몰라.

욕심의 유혹은 언제나 이렇게 쉽게 다가온다.


‘헤어질 결심’을 다시 봤다.

지난번엔 나 외에 9명이었는데 이번엔 나 포함 9명이었다.

이 중 2명은 내 지인이었으니, 다음 주에 극장에서 내리는 게 이해할만하다.

영화 중간에 2명이 나갔는데

지난번 봤을 때 나간 사람과 비슷한 부분에서 나갔다.

아니다 싶은 것의 지점은 대부분 비슷한 걸까.

솔직히 자막이 있더라도 외국인이 따라가기엔 좀 어렵겠구나 싶었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같은 대사의 뉘앙스를 자막만으로 어떻게 따라간단 말인가.

대화할 때 잘 쓰지 않는 한국어 단어를 캐치해서 그 의미를 찾기엔

스토리 따라가기에도 바쁘다.

하나 재미났던 건 탕웨이가 중국어 하는 장면도 네덜란드 자막만 나와서  

중요한 장면에서 중요한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

같은 언어를 써도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인간인데,

그러고 보면 몇천 개의 언어가 있는 이 세상에서

‘이해하다’란 동사는 인간을 대상으로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동사가 아닐까.     

두 번째 보니 안 보이던 게 보이고

여유롭게 딴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보는 내내 ‘의도가 보이는 디자인’에 대해 생각했다.

‘올드 보이’로 한국 영화에 패턴 벽지를 유행시킨 박찬욱 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콤비이니

으례 독특한 벽지가 나오겠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주인공 집의 푸른색 벽지 패턴이

산도 아닌 것이 바다도 아닌 것이, 애매하고 기묘하기 그지 없지 않은가.

산에서 시작해서 바다에서 끝나고

배경 노래로 정훈희의 ‘안개’도 계속 나오니

분명 같은 선상에서 나온 ‘의도적’ 디자인이겠지.

미장센을 강조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라서 그렇다지만

‘이 디자인 보여? 다 의도가 있는 거라고!’ 소리치는 디자인이

이상하게 거슬리는 걸 보면 내 디자인 취향도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한참 일거리를 찾을 때

류성희 감독의 미술팀에 들어가려고 류성희 감독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부암동 자하문 터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이 있었다.  

인터뷰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나의 궁극적 목표는 연극 무대’라고,

영화 미술팀에 들어가기엔 엉뚱하고 부적절한 답을 했던 건 기억난다.

영화 미술 하는 양반 앞에서 연극 무대 얘기를 하다니.

그녀의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속으로 ‘이 친구 뭐야?’ 했을 거다.

당연히 미술팀에 못 들어갔지.

그런 답하는 친구를 누가 뽑아.

하여간 난... 눈치도 없고 답도 없고... 어휴, 답답해.  

아무튼,

보는 내내 계속 ‘알겠어요, 그 의도 다 알겠다고요!’ 중얼거리다가

문득 앞으로 이 조그마한 네덜란드 도시에서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싶어

닥치고 그저 영화를 즐기자고 마음먹고 자세를 고쳤다.

아, 오해가 있을까봐 하는 말인데, 영화 참 좋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영화인데, 난 '호'쪽이다.   


어... 지금 몇 시인가 싶어 시계를 봤는데...

이제서야 자각한다.

오늘이 9월 11일이구나.

911이구나.

순간 21년(!!) 전 그날 아침 6 에비뉴에서 바라본  빌딩이 생각나며...

그런데 왜 이리 까마득할까.

갑자기 글 쓸 기분이 확 사라진다.

내일 미루 학교 보내려면 일찍 자야한다.

그만 쓰고 빨리 자자.


#일기 #이방인일기 #헤어질결심 #디자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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