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자유로워.]
진경은 고요한 집 침대에 엎드려 아버지를 생각했다.
지난겨울 눈이 펑펑 오던 날 진경의 아버지는 그렇게 뺨을 대고 누워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떠난 빈 집에서 글을 읽고 노을을 보고 조용한 하루를 괜찮다 괜찮다 보내다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혜선에게 진경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난 고아가 되었네."
전화를 걸었다.
" 43살에 고아가 되었는데 뭘. 이제 넌 뭐든 너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네."
혜선은 진경의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을 두고 폭설로 도로가 엉망이 된 날 혜선은 움직일 수 없었겠다. 진경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일주일쯤 뒤 진경의 꿈에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어주고는 ‘폐업’이라고 쓰여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경은 아버지가 남겨 준 잠수함을 타고 바다로 들어갔다. 바다 잠수함 속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잠수함 선반 위에 놓인 반짝이며 예쁜 팔찌를 함께 보다가 갖고 싶어 하는 여자에게 양보하고는 팔찌를 좋아하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잠수함이 산산조각 나 버리는 꿈이었다. 고요한 바다에 혼자 헤엄치고 있는 진경은 꿈속에서 울었다.
휴가를 내고 종일 뺨을 대고 엎드려 자다 저녁 무렵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자전거를 끌고 한강에 나왔다. 행주산성이 건너 보이는 강가 벤치에 앉아 일렁이는 물을 바라봤다. 지는 해가 등을 적시며 다독이고 갓 나온 여린 잡초들과 함께 진경은 조용히 자신의 시간 속에 있었다.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 한 진경의 삶은 이렇게 계속될지 모른다. 누군가 또 다른 혜선들은 그림처럼 그렇게 자신의 삶을 조용히 그리고 있는 진경을 찾아왔다 떠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며, 너도 너를 사랑하라고 순간을 즐기라며 감흥 없는 숙제를 남기고는, 왜 진경이 그들과 섞일 수 없는 건지 진경에게 숙제를 남기고는.
누구를 사랑하지 않는 진경에게 문제아라 낙인찍고 수치심을 남겨
연기의 가면을 무겁게 쓰도록 삶의 무게를 켜켜이 쌓아놓고는 말이다.
진경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전거에 다시 올라앉아 한강을 보며 달린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 혼자 달리고 있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는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4월의 바람은 온몸을 파고들고 벚꽃이 날려 얼굴을 때리기도 하지만 진경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늘 이유가 필요한 일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혜선이 진경에게 온다. 4년 만에 보는 얼굴이다.
진경은 혜선이 도착한다는 시간에 맞춰 서울역에 도착했다. 도착한 기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 속에 혜선이 보인다. 혜선도 진경을 발견하고 눈이 마주쳤다. 웃는다. 키가 작은 혜선을 향해 진경이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간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혜선, 여전히 귀엽네."
"귀엽다고? 넌 여전히 날 사랑하는구나."
"으휴, 얘가 또 시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