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얼마나 괜찮은 앤지 나도 알아. ]
혜선은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혜선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그러니까 혜선의 아기 수아가 진경에게 왔을 때쯤, 딱 그쯤에 실종되었다. 외출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린 혜선의 어머니를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설득해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아이를 두고 새로 시집을 가라며 할머니와 고모가 혜선을 키우기로 한 거다. 옛날이야기였다. 혜선이 초등학교 4학년 때쯤 교문 앞에서 “혜선이니?” 했던 자기랑 꼭 닮은 아줌마가 아무래서 혜선의 엄마였던 것 같다며 이해도 하지만 필요할 때 자신의 곁에 없었던 엄마가 가끔 원망스럽다고 했다.
혜선의 할머니는 깔끔한 분이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진경이 혜선의 집에 놀러 갔다 온 날 할머니는 진경과 놀지 말라고 하셨단다.
“우리 할머니가 신발이 지저분한 사람하고는 놀면 안 된단다. 너 우리 집 올 때는 신발 끈 안으로 넣지 말고 묶고 와 히히”
한글을 배우지 못해 읽지 못하는 할머니가 어떻게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 수 있었을까.
혜선이 대학교 3학년 때 첫 연애를 시작했다.
장장 5시간 동안 그 남자를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진경에게 이야기했었다. 신발이 깔끔하고 키가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있단다. 6개월의 진한 연애는 4학년 여름쯤 끝났다. 신발이 깨끗한 그놈은 야비한 눈빛을 가졌는데 왜 신발만 보고 눈을 보지 않았던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혜선은 그 남자 눈이 너무 좋았다며 울었다.
4학년 여름방학 취업 준비로 정신이 없는 진경에게
“진경, 너 소개팅 안 할래?”
“뭔 뜬금없는 소리야. 넌 내가 소개팅 같은 것에 적합한 인간형이라 생각하니? 난 매 순간 진지한데, 가서 미간에 힘주고 삶에 의미에 대해 물어봐도 돼?”
“그 남자 절친이야. 네가 그 남자 절친과 사귀어야 더블데이트를 하면 그놈한테 복수를 해 줄 것 아니야. 독설을 퍼부어 주면 돼.”
목표는 혜선의 그 놈을 만날 때까지만 이였다. 진경은 목적이 생기니 성실히 소개팅을 했다. 문제는 그 남자의 절친이 너무 진심이었다는 건데 미안하긴 했지만 목적은 이루었다. 절친이 좋다는 여자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눈빛이 야비한 그놈이 진경을 보러 왔고 혜선이 원하는 대로 독설을 퍼부어 주었다. 그날은 속이 후련했지만 며칠 뒤에 그놈이 호텔에 다른 여자와 들어가 혜선을 불렀다. 그 꼴을 보고 혜선이 분에 못 이겨 기절을 하는 바람에 그놈을 다시 봐야 했다. 신발이 깨끗했지만 야비한 눈빛을 가진 놈은 야비한 놈이다.
그놈의 절친에게는 깊은 사과를 했다. 진경이 보기에 그 야비한 놈이 친구는 괜찮은 녀석을 둔 것 같기도 했지만 다 유유상종일 것이다. 자꾸 학교로 찾아오는 절친 녀석 때문에 학교에 "세상 별일이 다 있다 진경이가 만나는 남자도 있다"며 궁금해했지만 몇 주 후에 뜸해지자 친척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절친 녀석은 두 달 뒤에 다른 여자친구를 만났다고 하니 진경도 안심이 되었다.
그놈과 헤어지고 검은색 원피스에 보랏빛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던 혜선을 그냥 밥이나 먹자며 불러냈었는데 23살 진경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쯤 혜선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 혜선이 4학년이 되고 고모는 이제 독립할 수 있겠다 싶어 결혼을 했고, 할머니는 다른 자식들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셨다. 4학년 여름부터 혜선은 공동욕실을 쓰는 반지하 자취방에 홀로 남겨졌다. 혜선이 이사한 날 가보고 문이 너무 허술해서 무서워하는 혜선을 보며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경의 집으로 돌아갔다. 진경은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엄격한 부모님이지만 진경에게 안전한 방을 보장해 주긴 한다는 점에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경은 안정된 기업에 정규직으로, 혜선은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다. 혜선은 결혼이 20대의 목표였고 자신의 목표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이 목표를 향해 세팅되었다. 서울 중심가에 있는 기숙사가 제공되는 회사에 시스템 관련직으로 들어가 다양한 경험과 문화생활이라는 이름 하에 소비생활을 했다.
진경도 2년간 부모님 집에서 살다가 독립했다. 26살이 되던 해에 혜선은 불안정한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의 길을 시작했고, 진경은 휴직을 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늘 어두운 혜선의 반지하방은 여름엔 시원했지만 습했고, 진경의 옥탑방은 햇빛이 방 끝까지 들어왔지만 외부 온도와 실내 온도가 같은 곳이었다.
진경은 26살 여름 대학원에 진학하고는 일주일에 4번 밤을 새웠다. 과제를 하다 고물 컴퓨터가 먹통이 되는 날은 새벽에도 혜선방에 쳐들어가 밤을 새웠다. 혜선은 안대를 하고 잠을 잤고 몰입해 있는 진경에게 말을 시키지 않고 조심조심 출근 준비를 하고 나갔다. 한 번은 혜선의 친구들이 놀러 온 저녁 급하게 뛰어가 간단히 인사만 하고는 컴퓨터 앞에 미동도 없이 앉아 남에 집에서 과제를 하는 진경을 보고 친구들은 뭐 저런 애랑 친구를 하냐고 했단다. 그걸 전해 주는 혜선은
하며 잘난 척을 했고
진경도
“내가 좀 이상하긴 하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혜선의 연애들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가끔 웃으며 말했고 진경은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한다며
그런 혜선이 진경의 집에 들어와 아이 엄마가 되었다.
진경은 혜선의 이야기를 장편 소설로,
아름다운 여주인공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그냥 함께 키워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