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어코 창가 자리를 고집하는 이유

- 내 안의 ‘기린’을 깨워 나만의 섬으로 떠나는 시간

by 노란 잠수함

‘평일인데 설마’ 했던 안일함이 화근이었다. 코레일 앱을 켜고 예매 버튼을 눌렀지만, 남아 있는 건 온통 역방향 아니면 통로 쪽뿐이었다. 날짜를 바꿀 수 없어 시간과 객차를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누군가 바리깡으로 정수리만 밀어버린 듯, 양방향 모두 창가 자리만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이쯤 되면 내가 원하는 자리가 무엇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순방향, 그리고 창가 좌석.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많은가 보다 하고 넘기려던 순간,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복기해 보니, 기차표를 예매할 때마다 창 측 좌석은 늘 가장 먼저 증발하듯 사라졌었다. 명절이든 평일이든, 대낮이든 칠흑 같은 밤이든 마찬가지였다. 밖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이나 어두운 야간열차에서도 사람들은 기어이 창가를 고집한다. 도대체 그 구석진 자리에 어떤 마력이 숨어 있는 걸까?


사실 따지고 보면 창가 쪽은 ‘상석’이 아니라 ‘험지’에 가깝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고, 짐을 꺼내기도 번거롭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옆 사람의 단잠을 깨워 양해를 구해야 하며, 여름에는 뙤약볕에 달궈지고 겨울에는 웃풍에 시리다. 엔진 소음도 통로 쪽보다 더 크게 울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숱한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곳을 갈망하는가.


그 물음을 곱씹다가,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통로 쪽이 타인의 시선과 부대끼는 ‘사회적 공간’이라면, 창가 좌석은 보이지 않는 휘장이 쳐진 ‘나만의 밀실’이 아닐까. 그 좁은 의자에 앉는 순간, 사회라는 우리 안에 갇혀 있던 정체불명의 짐승 하나가 사슬을 끊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온다. 녀석은 세상의 시선과 의무로부터 잠시 해방된 금단의 구역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슬픈 눈을 가진 ‘기린’으로 변신한다. 박민규의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속, 자신을 기린이라 소개하던 그 남자처럼.


창가에 앉은 기린은 곧장 항해를 시작한다. 잭 스패로우의 블랙펄 호든,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 호든 상관없다. 목적지는 단 하나, ‘자기만의 섬’이다. 그 고독한 섬에서 기린은 비로소 사회적 가면을 벗고, 긴 목을 빼어 잊고 지냈던 본연의 자아와 마주한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가 상상한 것처럼,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창 측 좌석은 내면의 고독과 자유를 마주하는 가장 작은 독방이며, 우리 안에서 맥없이 웅크리고 있던 ‘기린’을 꺼내는 은밀한 탈출구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그 구석진 자리를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에 기차를 타게 된다면, 창가 자리를 선점한 사람들의 옆얼굴을 새롭게 바라보게 될 것 같다. 그들은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과 기대를 잠시 선반 위에 올려두고, 자신만의 섬으로 항해하고 있는 중일 테니까. 깊이 잠들어 있던 내면의 기린을 흔들어 깨우며.


그래서일까.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짐을 챙기지 않은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현실로 복귀하기 전, 1분이라도 더 ‘나’에게 머무르고 싶은 것이다. 그 짧은 머뭇거림 속에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은 간절함이, 잊고 지냈던 야성을 다시 붙잡고 싶은 바람이 깃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기어코 창가에 앉으려는 건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은밀하고도 치열한 방식으로, 나 자신을 지키고 되찾으려는 거룩한 의식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서로에게 스며들어 한 그루가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