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을 던져 타인의 속을 데우는 삶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냉장고 문을 연다. 애호박, 팽이버섯, 감자, 대파, 그리고 두부 한 모가 눈에 들어오자 머릿속에 정답이 떠오른다. 된장찌개. 오늘은 이 재료들을 모아 구수한 밥상을 차려야겠다.
재료를 씻고 다듬어 그릇에 담은 뒤, 찌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육수 낼 준비를 한다. 요즘엔 동전만 한 코인 육수 한 알이면 간편하게 국물 맛을 낼 수 있다지만, 나는 여전히 멸치와 다시마를 직접 우리는 쪽을 택한다. 손이 더 가고 시간이 걸려도, 그래야 음식에 ‘마음’이라는 재료가 하나 더 들어가는 것 같아서다.
다시마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냄비에 담고 찬물을 붓는다. 맑은 물 아래로 매끈한 다시마 조각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이제 멸치를 손질할 차례다. 멸치는 육수의 쓴맛을 없애기 위해 내장을 제거해야 한다. 마른 몸뚱이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검은 내장을 하나하나 떼어 내며 녀석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날렵했던 지느러미는 바싹 말라 오그라들었고,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흐릿하다. 하지만 은빛 비늘 사이사이에는 여전히 바닷속 햇살의 반짝임과, 멀리 펼쳐진 수평선의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다 이내 손끝이 멈칫한다. 내 손안에 놓인 이 바삭한 멸치 한 마리. 지금은 미라처럼 딱딱해진 몸이지만, 한때는 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생명이었을 터. 참치처럼 대양을 호령하진 못했어도, 통영과 여수, 울진의 앞바다를 누비며 쏟아지는 물살을 타던 행복한 시절이 있었으리라. 해초 숲 사이를 지나며 파도의 속삭임을 듣고, 때로는 바위틈에 숨어 어부들의 노랫소리를 엿듣기도 했겠지.
그러던 어느 날, 그물에 걸려 뭍으로 끌려왔을 것이다. 뜨거운 볕 아래서 하얗게 말려지고, 비닐에 포장돼 시장 좌판에 올랐을 테고. 누군가의 밥반찬이 되거나 젓갈로 변하고, 더러는 가루가 되어 조미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내 부엌 조리대 위에 누워 끓는 물에 들어갈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작고 볼품없는 몸으로 마지막까지 제 쓰임을 다하려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아 업신여긴다’라는 뜻으로 이름에 ‘멸(蔑)’ 자가 붙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존재를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뜨거운 물에 온몸을 던져 깊은 맛을 우려냄은 물론, 제 몸을 갈아서까지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는가. 죽어서까지 인간을 이롭게 하니,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그 모습은, 불가에서 말하는 ‘보살행’과도 겹쳐 보인다.
멸치 한 줌 놓고 무슨 거창한 개똥철학이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세상엔 생을 마친 뒤에도 부끄러움만을 남기고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타인의 몫을 가로채고, 위로는커녕 고통을 떠넘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에 비하면 멸치는 죽은 뒤에도 국물 속에 자신의 향기(香氣)를 남기며,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섬긴다. 그 얼마나 고결한 생인가.
보글보글, 찌개가 끓기 시작한다. 냄비 안에서 멸치 한 줌이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 멸치의 형체는 흐물흐물해져 볼품없이 변해가지만, 국물은 점점 황금빛으로 깊이를 더한다. 그 깊어지는 국물 냄새를 맡으니, 내 소란했던 마음도 고요히 가라앉는다.
멸치는 말없이 깊다. 자신의 형체를 지워 국물의 맛을 완성하고, 누군가의 빈 속을 뜨끈하게 데운다. 그 헌신은 매일의 식탁에서 조용한 위로가 된다.
우리네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크고 대단한 존재가 되지 않아도 좋다. 누군가의 차가운 마음을 덥히고, 허기진 속을 채우는 역할이면 족하다. 한 줌의 멸치가 내어준 그 진하고 구수한 맛처럼, 나도 내 자리에서 그렇게 쓰이고 싶다.
식탁 앞에 앉아 갓 끓여 낸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뜬다. 멸치 한 줌이 온몸으로 건네는, 뜨거운 삶의 자세를 가만히 삼킨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단하고 깊은 생(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