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처럼 스며드는 사람이 그리운 날

- 젖은 몸으로 와서 내 마음의 결을 읽어주는 존재

by 노란 잠수함

나는 비를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비는 젖은 몸으로, 소리를 내며 찾아오기 때문이다.


만약 비가 젖지 않은 채 내린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젖지 못하는 것은 스며들 수 없고, 스며들지 못한다는 건 결국 타자와 한 몸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꽃잎처럼 아름답게 흩날린다 해도, 메마른 땅을 적시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나무뿌리에 닿지 못하고 바람에 날려갈 뿐이라면, 그 비는 생명을 일으켜 세울 기회를 잃은 것이다.


비의 본질은 '스며듦'에 있다.

비는 강으로 배어들어 죽은 듯 엎드려 있던 물결을 깨운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흙덩이도 빗물에 흠뻑 젖어야 비로소 숨구멍을 열고, 뿌리가 마른 풀도 비를 머금어야 잎맥을 펼친다. 그러니 적시지 못하는 비, 스며들지 않는 비라면 아무리 절세가인의 얼굴을 했다 한들 반길 수 없는 노릇이다.


비가 대지를 시원스레 적시는 풍경만 봐도 마음이 환해지는 건, 믿음 때문이다.

저 빗물이 찢긴 땅을 꿰매고, 갈라진 틈을 메우고, 말라붙은 나무뿌리를 어루만져 되살려낼 것이라는 믿음. 돌담 틈 들꽃 하나, 깊은 숲 속 새 둥지까지 흘러들어 세상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스며든다는 건 곧 살려낸다는 뜻이다.

대지와 꽃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각박한 세상에 시달려 쩍쩍 갈라진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빗물처럼 누군가의 마음이 내 안 깊숙이 파고들어 단단한 옹이를 풀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비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를 찾는다.

홀로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자신을 만나거나, 애인을 부르고, 소원해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비 오는 날, 누군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내리는 비를 보며 우리 마음도 누군가에게 스며들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비가 젖은 몸으로 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는 '소리'를 내며 와야 한다.

자연의 소리 중 단연 으뜸은 빗소리다. 청아한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좋지만, 빗소리가 가진 미덕은 따로 있다.


빗소리는 늘 새롭고, 신비롭다. 같은 소리가 단 하나도 없다.

비는 자신이 떨어지는 시간, 장소, 그리고 '대상'에 따라 목소리를 바꾼다.

숲에서는 잎사귀를 때리며 소란스럽게, 강 위에서는 묵직하게. 양철지붕 위에선 소프라노처럼 쨍쨍거리고, 초가집 처마 밑에선 바리톤의 저음으로 웅장하게 울린다. 아스팔트 위에서와 황톳길 위에서의 언어가 다르다.

심지어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도 그 음색은 달라진다. 불안한 밤엔 서늘하게, 평온한 오후엔 다정하게, 사랑이 시작될 땐 왈츠처럼, 이별할 땐 진혼곡처럼.


왜 그럴까.

그것은 비가 늘 '상대에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비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타인의 결에 맞추어 부드럽게 녹아든다. 그래서 빗소리는 단순히 표면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와 어우러져 새롭게 태어나는 화음(和音)이다.

자동차 보닛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거친 헤비메탈이라면, 자전거 핸들 위로 떨어지는 소리는 서정적인 포크 음악 같다. 숲을 흔드는 소리가 오케스트라라면, 텃밭을 적시는 소리는 섬세한 실내악이다. 비는 그렇게, 철저히 타자의 결에 맞춰 흐르는 겸손한 존재다.


비는 스며듦의 끝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운다.

이름도, 모양도, 소리까지도 내려놓으며 강이 되고, 뿌리가 되고, 생명의 일부가 된다.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지만, 그로 인해 세상은 다시 살아난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자기희생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비를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비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내 마음 깊이 스며들어 와,

나의 결에 맞춰 목소리를 낮추고

나를 세심하게 어루만져 주는 사람.


오늘따라 유난히,

그런 빗물 같은 사람이 그립다.






매주 목요일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자님의 건강과 평안을 마음 다해 기도할게요.

읽어주셔서, 그리고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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