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선들의 세상에서 부드럽게 살아남는 기술
“아니, 이 시간에 웬 선글라스야? 좀 벗지 그래?”
저녁 모임 자리, 한 지인이 대뜸 내게 쏘아붙였다. 눈이 불편해서 쓴 것뿐인데, 그는 내가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지적했다.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내 마음에 박혔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굳이 이유를 묻기보단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고 넘기거나, 아주 낮은 목소리로 “오늘 분위기랑 잘 어울리시네요.” 하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싫어 그저 “아… 그러게요.” 하며 얼버무려 버렸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직선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늘 빙그르르 도는, 타원형 인간.
그래서인지 가끔은 거침없는 ‘직선형 인간’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은 자기 색이 분명하다. 취향이 뚜렷하고, 생각을 말할 때도 주저함이 없다. 반면 나는 늘 중간 어디쯤에서 어정쩡하게 머문다. 선명한 색이라기엔 흐릿하고, 무채색이라 하기엔 애매한, 옅은 주홍빛 같은 사람.
나는 견고한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상대에 따라 입장을 달리한다. 발라드를 좋아하는 친구 옆에선 잔잔한 음악에 젖고, 흥이 많은 사람 옆에선 덩달아 어깨를 들썩인다. 결정도 혼자 내리기보다 누군가 방향을 정해주는 게 편하다. 그러니 나를 ‘우유부단의 끝판왕’이자 ‘눈치 보기의 종결자’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직선형 인간을 마냥 동경하는 것만은 아니다.
강한 개성은 매력적이지만, 때로는 부담스럽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장미꽃도 가까이 다가가면 가시에 찔릴까 조심스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화살처럼 빠른 직선이라면, 나는 돌아오는 길까지 포함한 긴 궤적을 그리는 타원이다.
요즘처럼 속도가 미덕인 시대엔 직선이 유리해 보인다. 그들이 방향을 정해 밀어붙이면, 타원은 그 흐름을 읽고 조율하느라 바쁘다. 직선이 공격수라면 타원은 수비수다. 문제는 그 직선이 날린 날카로운 화살을 타원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 곁엔 말끝이 무디고 눈치를 보는, 둥글둥글한 이들이 더 많다.
타원형 인간의 숙명은 ‘눈치 보기’다.
누군가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단순하다. 그게 더 평화롭기 때문이다. 어색한 침묵, 갈등의 기류를 견디느니 살짝 손해 보더라도 한 걸음 물러서는 편이 낫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는 것, 그것이 타원의 생존법이다.
물론 나도 가끔은 직선 흉내를 낸다.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십중팔구 낭패다.
얼마 전 외출 준비를 할 때였다. 내가 고른 셔츠를 보더니 아내가 한마디 했다.
“그건 좀 칙칙하지 않아? 이 셔츠가 더 낫지.”
예전 같았으면 “응, 알겠어” 하고 갈아입었을 텐데, 그날따라 마음이 뾰족해졌다. ‘왜 내가 입고 싶은 옷이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야 하지?’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이게 더 편한데, 이걸로 입고 가면 안 될까?”
순간 공기가 살짝 얼어붙었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짧은 침묵 속에 흐른 미묘한 온도 차이를 나는 정확히 감지했다. 그날 온종일 뭔가 모르게 어색했다. 결국,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다음엔 그냥 갈아입는 게 낫겠어.’
그리고 나는 또다시 익숙한 타원의 궤도로 돌아왔다.
눈치 보며 산다고 해서 타원형 인간의 삶이 비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하는 지혜일지 모른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말처럼, 눈치란 남의 마음을 살피는 배려이자 상대와의 거리를 조율하는 감각이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 그리고 직선과 타원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때로는 삐걱대고 덜컥거리지만, 그 다름 덕분에 세상은 조화롭다.
우리는 저마다의 선을 그리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뚝심 있게 직선을 긋고, 또 누군가는 부드럽게 선을 휘어간다.
오늘도 나는 내 방식대로, 조심스럽고 유연하게 하나의 타원을 그린다.
그 선은 느리지만, 그 안엔 누구도 다치지 않길 바라는진심이 담겨 있다.
그게 나답고, 그런 나로 충분하다.
매주 목요일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자님의 건강과 평안을 마음 다해 기도할게요.
읽어주셔서, 그리고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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