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로 또 같이, 부부 관계에도 ‘환기’가 필요하다
아내가 집을 비운다. 해마다 장모님 생신이면 아내는 1박 2일 일정으로 친정에 내려간다. 아내가 떠난 빈집에는 낯선 고요가 깃들고, 뒤이어 나만의 달콤한 여유가 밀물처럼 차오른다.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다. 다만 가끔은, 철저히 혼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어떻게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요리할지 상상하는 순간부터, 마음은 갓 구운 풀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머릿속엔 이미 완벽한 계획표가 짜여 있다. 우선 아내가 질색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스릴러 영화를 거실 불을 끄고 감상할 것이다. 긴장감이 팽팽한 화면 앞에서, “어머, 징그러워!” 하는 옆자리의 비명이나 잔소리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풍미는 배가될 터. 야구도 마찬가지다. 늘 5회 정도 보면 채널을 돌려야 했던 설움은 안녕이다. 오늘은 9회 말 투 아웃, 끝내기 안타가 터지는 순간까지 꼼꼼히 지켜볼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시청이 아니라, 밀린 숙원 사업의 해결이다. 여기에 평소 취향 차이로 포기했던 자극적인 라면이나 기름진 곱창을 눈치 보지 않고 곁들일 수 있다니. 이 기다림은 마치 첫 해외여행을 앞둔 날의 두근거림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엔 엄격한 ‘보안 수칙’이 따른다. 이 널뛰는 기쁨을 절대로 아내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음식의 간을 맞추듯, 표정과 감정의 농도를 아주 섬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말투에, 살짝 아쉬운 기색을 한 스푼 곁들이는 정도가 딱 좋다. “아… 당신 혼자 보내기 미안한데. 나도 같이 갈까?” 이때 장모님 용돈 봉투를 슬며시 건네면 금상첨화다. 지나친 아쉬움은 작위적이고, 너무 무덤덤하면 서운함을 산다. 결국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평양냉면 육수’처럼 슴슴하면서도 은근한 맛을 내는 것이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 아내가 한 손엔 가방, 다른 손엔 짐 꾸러미를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여느 때처럼 당부의 한마디를 남긴다. “밥 대충 먹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있어요.”
도어록이 ‘철컥’ 하고 잠기는 소리. 그 순간, 비로소 나의 시간이 봉인 해제된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오롯이 나라는 우주에 집중할 때가 온 것이다.
사실 결혼생활은 상대를 ‘늘 곁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순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공기도 갇혀 있으면 탁해지기 마련이다. 창문을 열어 정체된 공기를 바꿔야 새 숨을 쉴 수 있듯, 부부 사이에도 간헐적인 ‘거리 두기’와 ‘고유한 영역의 존중’이라는 환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 자유를 허투루 쓰지 않는다. 먼저 집을 말끔히 청소하고, 흐트러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눈앞이 어지러우면 마음도 산란해져, 쉬어도 온전히 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려견 식기를 닦아 사료를 채우고 배변 패드까지 갈아놓고 나면,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린다. 책임을 다한 뒤에 누리는 자유란 한층 더 감미로운 법이다.
점심은 밥솥에 남은 찬밥에 김을 싸서 적당히 때운다. 대충 먹는 밥이지만, ‘혼자’라는 조미료가 더해져 꿀맛이다. 저녁엔 그동안 참아왔던 매운 닭발을 배달시켜 먹을 생각에 벌써 침이 고인다. 야구 경기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소파에 길게 모로 누워 읽다 만 책을 펼쳐 든다. 선풍기 바람이 발끝에서 머리칼까지 시원하게 훑고 지나가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내 편이 된 것만 같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같은 집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이중주다. 물리적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마음까지 친밀한 건 아니다. 오히려 숨 쉴 틈 없는 과도한 밀착은 사랑을 질식하게 만들 수 있다. 서로의 고독을 존중하고 적절히 거리를 유지할 때, 관계는 더 단단하고 애틋해진다.
어쩌면 결혼생활이란 매일 서로의 거리를 재는 측량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가까이 안아줘야 할 때와 한발 물러서 줘야 할 때를 구분하는 지혜. 서로의 ‘혼자 있음’을 존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때, ‘함께 있음’은 더욱 빛을 발한다. 가깝게 붙어 있어도 차가운 부부가 있고, 떨어져 있어도 온기가 느껴지는 부부가 있는 이유다.
내일 아내가 돌아오면, 나는 다시 그녀의 리듬에 맞춰 내 하루를 기꺼이 조율할 것이다. 오늘의 이 황홀한 고독과 충전이, 내일의 동행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떨어져 봐야 보이는 소중함이 있고, 비워야 비로소 깊어지는 자리도 있다. 적당한 거리를 읽어내고, 서로의 숨구멍을 틔워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유통기한을 늘리는 가장 현명한 방부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