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사소한 순간이 여행이 될 때
4교시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급식실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 찼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비빔밥.
식판 위에 놓인 커다란 그릇. 하얀 쌀밥 위에 은은한 초록빛 애호박, 붉은 무생채, 노란 콩나물이 고명처럼 얹혀 있었다. 그 위에 참기름 한 숟가락을 툭 떨어뜨려 쓱쓱 비비니, 그릇 안은 이내 화려한 꽃밭이 되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것들이 한데 섞여 만들어내는, 익숙하고도 정겨운 우리네 맛이었다.
게 눈 감추듯 그릇을 비우고 나니, 식판 한구석에 놓인 후식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받아간 오늘의 디저트, 바로 ‘월○콘’. 바스락거리는 종이 포장지의 감촉과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움이 오후 수업을 앞둔 나른함을 깨웠다.
습관처럼 포장을 북 찢으려다 문득 멈칫했다.
평생 수백 개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단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질문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건 무엇으로 만들어진 걸까?”
교단에 서서 나는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얘들아, 아무것도 무심히 넘기지 마라. 깨어 있는 눈으로 의식하며 살아라.”
그렇게 가르쳤던 내가, 정작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는 이토록 무심했다니. 선생으로서의 민망함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뒤통수를 쳤다.
나는 돋보기를 들이대듯 포장지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성분표. 정제수, 설탕, 혼합분유…. 빽빽한 활자들 사이를 지나던 내 시선이 낯선 지명 하나에 닻을 내렸다.
‘바닐라향(마다가스카르산)’
순간, 시끌벅적한 급식실의 소음이 잦아드는 듯했다.
그 이름 하나로 입안에 진득한 바닐라 향이 퍼지는 것만 같았다. 영화 <꿈꾸는 사진관>에서 보았던, 지구 반대편의 붉은 석양과 안개를 휘감은 신비로운 바오바브나무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분표는 마치 축소된 세계지도 같았다.
밀은 미국과 호주, 혼합분유는 네덜란드와 캐나다 그리고 독일, 코코아는 말레이시아…. 아이스크림 포장지 한 장에 오대양 육대주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 그래서 이름도 월드(World)콘이었나.’
나는 아이스크림을 쥔 채 상상의 지도를 펼쳤다.
네덜란드라는 글자 위에선 풍차 마을의 바람개비가 돌고, 자전거를 탄 소녀가 웃으며 지나갔다. 미국과 캐나다의 밀밭에선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보라가 튀는 듯했고, 독일산 분유에선 뮌헨 맥주 축제의 왁자지껄한 건배 소리가 들려왔다. 말레이시아의 카카오 농장에선 덥고 습한 공기 속에 진한 코코아 향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후식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의 햇살과 바람, 농부의 땀방울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낸, 전 지구적인 합작품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의식하라’는 나의 잔소리가 교실이 아닌 급식실 식판 앞에서 살아날 줄이야.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삼켜온 달콤함 속에, 실은 거대한 세계가 통째로 녹아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콘이 부서지며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이 혀끝을 감쌌다. 눈을 감자 마다가스카르의 뜨거운 햇살이, 네덜란드의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1,5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로 나는 잠시 여행자가 되었다.
거창한 비행기 티켓만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손끝에 닿는 사소한 사물 하나, 무심코 지나친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세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머무는 자리에서 숨 쉬고 있다.
오늘, 학교 급식실에서 맛본 이 달콤하고 거대한 세계를 음미하며 생각한다.
삶이란, 이렇게 일상 속에 숨겨진 마다가스카르를 하나씩 발견해 가는 즐거운 여정이라고.
독자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미지 출처 : NAVER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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