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눈물의 씨앗

- 연민(憐憫), 그 아프고도 깊은 사랑의 뿌리에 대하여

by 노란 잠수함

사랑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두꺼운 철학서를 펼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우리가 무심코 흥얼거리는 대중가요의 가사 한 줄이 철학자의 웅변보다 더 깊숙이 폐부를 찌르기도 한다.


나훈아의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그 좋은 예다. 나는 이 투박한 제목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내밀한 속살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하필 ‘눈물의 씨앗’일까. ‘행복의 씨앗’이나 ‘기쁨의 씨앗’이라 노래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유는 명확하다. 기쁨과 행복은 화려하지만 휘발성이 강해 금세 날아가 버린다. 그것만으로는 사랑의 그 질긴 본질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만약 사랑의 본질이 오직 즐거움이라면, 사랑하는 연인들은 늘 웃고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자주 젖어들고, 더 깊이 아파한다.


물론 작사가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려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랫말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연민(憐憫)’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내고 싶다.


사랑은 남녀 간의 에로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 혹은 깊은 우정 사이에도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필연적으로 ‘눈물’이라는 열매가 맺힌다. 사랑하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감정, 그것이 바로 연민이다.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동정(同情)과는 다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이 내 안에서 공명(共鳴)하여, 기어이 같이 아파하고야 마는 상태다.


나는 최근 이 사실을 내 삶 속에서 사무치게 깨달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첫째 딸이 얼마 전 아이를 낳았다. 제왕절개 수술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딸을 생각하니, 수백 킬로미터 밖의 내 가슴에도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곁에 있어 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마음이 타들어 갔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딸을 상상하는데, 30여 년 전 기억이 겹쳐 보였다. 1.83kg. 겨우 그 무게로 세상에 나온 팔삭둥이. 툭하면 코피를 쏟던 그 작고 여린 핏덩이가 내 딸이었다. 인큐베이터 속의 아이를 바라보며 “제발 숨만 쉬게 해 달라”라고 기도했던 그 두려움의 시간들이, 딸의 출산 순간과 오버랩되며 기어이 내 눈가를 적셨다. 딸의 진통이 내 살가죽의 고통으로, 딸의 두려움이 나의 공포로 전이되는 순간. 나는 사랑의 뿌리가 다름 아닌 ‘연민’에 닿아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사랑 없는 연민은 가능하다. 뉴스 속 타인의 불행을 보고 혀를 찰 수는 있다. 하지만 ‘연민 없는 사랑’은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의 아픔이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얕은 호감일 뿐 사랑이라 부르기 어렵다. 사랑은 기쁨과 웃음을 선물하지만, 결국 눈물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연민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자비(慈悲)’라 한다. 자(慈)는 기쁨을 나누는 마음이요, 비(悲)는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슬픈 마음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 성경 또한 말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진정한 사랑은 환희의 순간보다, 함께 울어야 하는 순간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달콤한 사탕처럼 기억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랑의 뿌리는 늘 축축한 연민의 땅에 박혀 있다. 연민 없는 사랑은 화려할지 몰라도 가뭄이 들면 쉽게 말라죽는다. 반대로 눈물의 씨앗을 품은 사랑은 시련 속에서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린다.


그러니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랫말을 단순히 통속적인 유행가 가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삶의 가장 아프고도 깊은 진실을 담은 명문장이다.


사랑은 눈물을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해서는 안 된다. 씨앗이 물을 머금어야 싹을 틔우듯, 사랑도 눈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흘리는 그 눈물이야말로, 사랑을 사랑답게 완성하는 가장 진실한 양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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