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요술봉이 있다면

-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라지는 진짜 이유

by 노란 잠수함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니나가 잡혀 있는 마왕의 소굴로~"


1970년대 후반, 동양방송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폴>을 기억하는가. 현실과 마법 세계를 넘나들며 마왕에게 납치된 니나를 구하는 소년 폴의 모험담. 당시 국민학생이던 나와 또래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숨을 죽이곤 했다.


주인공은 폴과 니나였지만,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캐릭터는 단연 ‘팟쿤(찌찌)’이다. 수제 인형에 영혼이 깃든 이 신비한 존재는 뿅망치처럼 생긴 요술봉을 휘둘러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졌다.

마왕의 부하들이 덮쳐올 때, 팟쿤이 요술봉을 내리치며 주문을 외우면 세상은 정지화면처럼 멈춰 섰다. 그 정지된 시간의 틈을 타 위기를 모면하고, 4차원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던 그 짜릿함. 어린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침을 꿀꺽 삼키며 팟쿤의 요술봉을 탐내곤 했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만화적 설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 나는 사무치게 그 요술봉이 그립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화살처럼, 아니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뇌의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려져서 그렇다고 했다. 심리학자 이혜진은 새로운 경험이 줄어들어 기억할 만한 자극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의 말이니 일리 있는 설명일 테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이 속도감의 원인이 ‘아쉬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움이란 모자라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제 막 사랑에 불이 붙은 청춘남녀를 보라. 그들에게 하루 24시간은 늘 모자라다.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아쉽고 간절한가. 그러니 하루가 마치 한 시간처럼 훌쩍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 아쉬움은 청춘보다 중년에게 더 절실하다.

모래시계를 떠올려 보자. 모래가 가득 차 있을 때는 줄어드는 게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쪽에 남은 모래가 바닥을 드러낼수록, 떨어지는 속도가 유난히 빨라 보이는 법이다.


우리네 인생 시계도 그렇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시간은 가속도가 붙는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아깝고 소중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안엔 간절한 욕망이 피어난다.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아주 오래된 욕망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그래서일까, 나이 들수록 ‘공상’에 빠지는 시간이 잦아진다. 실현 가능성 없는 상상이지만, 그것은 빠르게 달아나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어른의 투정 같은 것이다.


요즘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혼자 실없이 웃곤 한다.

내 손에 팟쿤의 요술봉이 있어, 흐르는 시간을 ‘뿅’ 하고 멈춰 세우는 상상.

혹은 조선의 기녀 황진이가 동짓달 긴 밤을 베어내어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겠다 했던 것처럼, 나의 자투리 시간을 얼음틀에 담아 냉동실에 꽁꽁 얼려두는 상상.

그랬다가 정말 간절하고 아까운 순간이 오면, 냉동실 문을 열고 얼려둔 시간을 하나씩 꺼내어 천천히 녹여 쓰고 싶다.


어린 시절엔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시간을 멈추고 싶었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 평범한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서 시간을 멈추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여전히 팟쿤의 요술봉을 꿈꾸는 철없는 어른인가 보다.




이미지 출처 : Daum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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