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통로가 악기가 된 순간

- 각자도생의 도시에 흐른 화음

by 노란 잠수함

터미널 지하상가.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발걸음 사이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사메 무초」, 「백만 송이 장미」, 「비 내리는 영동교」, 「시월의 멋진 날에」, 「유 레이즈 미 업」. 누구라도 제목만 들으면 선율을 떠올릴 수 있는 친숙한 곡들이다.


국적을 알 수 없는 한 쌍의 외국인이 들려주는 연주 덕분에, 북적이는 상가 한복판이 순식간에 작은 콘서트장으로 변했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이 손을 잡은 젊은 엄마, 퇴근길에 무심히 걷던 직장인, 여행 가방을 끄는 노부부까지. 연주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눈빛은 한결 차분해졌고, 굳어있던 표정에는 옅은 온기가 번졌다.


나 역시 그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서울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는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바삐 걸어가던 참이었다. 평소라면 이어폰을 꽂은 채, 타인과의 옷깃이 스치는 것조차 불쾌해하며 종종걸음으로 지나쳤을 길이었다.


터미널이라는 공간은 본래 그렇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통로겠지만, 나 같은 이방인에게는 서둘러 떠나야 할 환승지일 뿐인 곳.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설렘보다는 어딘가로 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지배하는 곳. 이곳에서 타인은 그저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거나,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낡은 앰프를 타고 흐르는 바이올린의 떨림이 내 발목을 잡았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이방인들의 구슬픈 트로트 가락. 그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는 선율이 차가운 지하도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연주자와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낯설게만 느껴지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그 원 안에는 부드러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것은 따뜻한 ‘위로’였고, 말 없는 ‘교감’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멘 청년이 눈을 감고 고개를 까닥였고, 파마머리 중년 여성은 「비 내리는 영동교」의 멜로디에 맞춰 나직하게 흥얼거렸다. 유모차에 탄 아기가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치자, 곁에 서 있던 넥타이 차림의 남자가 빙긋이 웃으며 아기를 바라보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빨리 가라", "경쟁에서 이겨라", "절대로 손해 보지 마라"라고 속삭인다. 우리는 그 거친 주문에 순한 양처럼 길들여져, 스스로를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외딴섬에 가두고 사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단함에 눈감고, 나의 안위만을 지키기 위해 벽을 높이 세우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 믿으면서.


하지만 그날 지하상가의 풍경은 정반대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들이 켜는, 서툰 멜로디 하나에도 사람들은 기꺼이 발길을 멈추고 굳게 닫았던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살아온 길도 제각각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음악 안에서 함께 위로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이기심과 경쟁심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덧입은 갑옷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연주에 귀 기울이는 존중, 아름다운 것을 보면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눈빛으로 "당신도 오늘 하루 참 힘들었군요"라고 다독여주는 연대와 공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인간다움의 원형이 아닐까.


연주가 끝났다. 그들이 수줍게 인사를 건네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주머니를 뒤적여 지폐를, 동전을, 혹은 따뜻한 눈인사를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 담았다. 그것은 적선이 아니라, 빈 마음을 온기로 채워준 것에 대한 마땅한 보답이자 감사의 표시였다.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소음이 차올랐고, 지하상가는 여느 때처럼 분주해졌다. 하지만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조금 전과는 왠지 달라 보였다. 잔뜩 웅크렸던 어깨가 조금은 펴진 듯했고, 무표정했던 얼굴에는 온기가 감돌았다.


나 또한 어깨에 멘 가방끈을 한 번 고쳐 매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넣으며 생각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갈라놓으려 해도, 우리는 결국 연결된 존재들임을. 이 차가운 도시를 지탱하는 힘은 독한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곁을 내어주는 온기임을.


다시 걷기 시작한 내 발걸음 뒤로, 아직 가시지 않은 바이올린의 잔향(殘響)이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따라왔다. 소음과 음악이 뒤섞여 공명하던 그 순간, 차가운 지하 통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악기였다.




매주 목요일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자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할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미지 출처 :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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