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표 하나, 새로운 문장이 되다

- 숨표와 마침표로 읽는 인생의 문장

by 노란 잠수함

책 한 권을 커다란 체에 담아 흔든다면 어떻게 될까. 화려한 수식어, 현란한 문장들은 그물망에 걸리겠지만, 그 틈새로 빠져나와 바닥에 우수수 쏟아지는 건 아마 가장 작지만 단단한 알갱이, 수천 개의 마침표일 것이다. 어찌 보면 글을 쓴다는 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을 끊어내고 적절한 자리에 점을 찍어 가는 일인지 모른다. 더는 찍을 점이 없을 때, 비로소 한 편의 글은 완성된다.


하지만 문장 끝에 놓인 모든 점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있다면, 그 점은 멈춤이 아니라 바통을 건네기 위한 짧은 호흡이다. 잠시 숨을 고르며 “이제 네 차례야”라고 속삭이는 다정한 신호. 그러니 그것은 마침표라기보다 ‘숨표’라 불러야 마땅하다.


삶은 글쓰기와 참 많이 닮았다. 우리는 날마다 하루라는 문장을 써간다. 한 달이 지나면 그것이 하나의 문단이 되고, 열두 달이 쌓이면 한 편의 글이 써진다. 그렇게 해마다 새로운 페이지를 채워가며, 마침내 누구나 자신만의 책 한 권을 남기고 떠난다.


하지만 그 빽빽한 활자들 사이에는 수많은 숨표가 숨어 있다. 나이를 먹거나 환경이 변하며 자연스레 찍히는 숨표들도 있지만, 어떤 숨표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찍어야만 한다. 관성처럼 이어오던 삶의 궤적을 끊어내고, 익숙한 문장을 여기서 마무리 짓겠다는 결단. 그것은 언제나 무겁고 비장하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서른세 해.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시간 동안,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늘 목이 칼칼했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건네느라 마른 목을 물 한 모금으로 축이며 숨을 고르던 날들. 3월이면 아이들의 이름을 입에 붙이느라 출석부가 닳도록 들여다보았고, 2월이면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가슴 한구석이 휑하곤 했다. 수업 시작 종소리는 내 심장 박동과 같았고, 교실은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 익숙한 공간을 제 발로 걸어 나오던 날을 기억한다. 텅 빈 교실, 칠판 귀퉁이에 지워지지 않은 낙서, 창가로 비스듬히 들어오던 오후의 햇살, 그리고 묘하게 서늘했던 복도의 공기. 나는 33년 동안 쥐고 있던 출석부를 내려놓으며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점 하나를 꾹 눌러 찍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퇴직(退職)’이라 불렀다. 물러날 퇴(退), 직분 직(職). 그 단어는 어딘가 쓸쓸하고, 종결의 의미를 강하게 품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이제 다 끝났으니 편히 쉬라”며 위로했고, “너무 이른 결정 아니냐”며 걱정하기도 했다. 문 하나를 닫는 일에는 언제나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기에, 등 뒤로 ‘철컹’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깨달은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뜨고, 고요한 베란다 창가에 섰을 때 비로소 알았다. 그것이 마침표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문장과는 문법도, 리듬도 전혀 다른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 가장 길고 깊은 숨표였던 것이다.


그 숨표 덕분에 나는 비로소 멈춰 설 수 있었다. 멈추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지난 33년간 내 삶을 지배했던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지우고, 그 자리에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적어 넣었다. 평생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이제야 비로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 되었다.


익숙함을 떠나는 일은 여전히 두렵다. 소속된 곳 없이 홀로 선다는 건 닻을 올리고 망망대해로 나가는 배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건너야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문장이 있다. 쉼 없이 달리기만 하는 문장은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숨 막히게 할 뿐이다. 적절한 때에 멈추는 것,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다음 도약을 위한 가장 적극적인 행위다.


혹시 당신도 지금 멈춰 선 채 불안해하고 있는가. 익숙한 곳을 떠나고 싶지만 두려움에 주저하거나, 원치 않는 멈춤 앞에 좌절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안심해도 좋다. 당신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더 힘차게 쓰기 위해 숨을 고르는 중일 테니까.


우리의 인생은 결국 단 하나의 마침표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그 긴 여정 안에는 수많은 숨표가 보석처럼 박혀 있다. 멈춤이 있기에 비로소 다음 문장이 태어난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가장 눈부신 숨표를 찍고 있다.




매주 목요일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자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할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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