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뎅과 양은 사이, 그 잔인했던 점심시간
후각은 생각을 압도한다. 기억의 심장부로 곧장 내달리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베란다 구석, 잊고 있던 사과 상자를 열자 시큼하고 들큼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겹겹이 봉인된 시간의 빗장을 단숨에 열어젖혔다.
어느 작가는 마들렌 한 조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길어 올렸다지만, 나는 이 퀴퀴한 악취 속에서 애써 외면해 온 그 시절을 맞닥뜨린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짓물러버린 사과를 비닐봉지에 담으며 생각한다.
'사과가 이리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니, 참 살만해졌구나.'
인간이 삶을 버텨내는 건 망각의 능력 덕분이라 했던가. 하지만 가난만큼은 망각의 경계 안쪽, 어두운 사각지대에서 완강히 버티고 있다. 기억의 갈피에 웅크리고 있다가, 칼날에 베인 상처가 아물어갈 즈음이면 여지없이 튀어나와 기어이 덧내고야 만다. 지금 내 코를 찌르는 이 냄새처럼.
아버지는 조모의 땅을 밑천 삼아 청계천 어딘가에 금은방을 냈다.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될 가족사의 서막은 아이러니하게도 황금빛으로 찬란했다. 사진첩 속엔 서울역 앞 흑백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여동생을 업은 엄마 손을 잡고, 앞서가는 아버지를 종종거리며 쫓는 내 모습. 서울 입성을 기념했을 그 사진은, 훗날 우리 가족을 빈곤의 나락으로 이끈 아버지의 무모함을 증명하는 서글픈 증서가 되었다.
깡촌에서 오리나 키우던, 약관을 갓 넘긴 청년에게 서울의 셈법은 가혹했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금은방의 꿈을 뒤로하고 학교 앞에 ‘꿀꿀이문방구’를 열었을 때가 우리 가족에겐 그나마 봄날이었다.
그러나 그 봄은 짧았다. 아버지가 문방구를 접고 방직 공장에 취직해 두어 해를 보냈을까. 운명은 가혹하게도 아버지가 당직을 서던 밤을 골라 기어이 그곳에 불을 놓았다. 그 화마(火魔)는 공장 건물뿐 아니라, 아버지가 남은 생을 버텨낼 의욕마저 몽땅 태워버린 게 분명했다.
가장이 무너지자 빈궁은 무너진 둑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살처럼 순식간에 삶의 구석구석을 집어삼켰다. 보증금이 얼마인지도 모를 어둑한 단칸방. 그 좁은 틈에서 서울 태생인 막내까지 다섯 식구가 속절없이 엉켜 지냈다.
어머니가 남의 집 설거지통을 붙잡고 간신히 버텼지만, 가난은 예의가 없어서 우리 집 문턱을 넘어 주인집에 맡겨놓은 보증금까지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다시 깡촌으로 밀려 내려갈 때, 수중에는 단 한 푼도 남지 않았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의 꿈은 빈수귀향(貧手歸鄕)이라는 처연한 마침표로 끝이 났다.
서울을 떠나기 전, 내가 다닌 중학교 교실은 가난을 낭만으로 치환하기엔 너무도 차가운 공간이었다. 그 시절 읽었던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은 내게 어떤 허구보다 더한 기만이었다. 그 비참함을 행복으로 포장하기엔 내가 맞닥뜨린 현실이 송곳처럼 매서웠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점심시간은 허기 이상의 형벌이었다. 도시락을 꺼내는 순간, 우린 '스뎅'과 '양은'으로 선명히 갈렸다. 가난이 진정 견디기 힘든 건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남과 나를 저울질하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비굴해지며, 마침내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가죽 케이스에서 나오는 매끈한 ‘스뎅(스테인리스)’ 보온 도시락을 마주할 때마다 내 누런 양은 도시락은 기가 죽었다. 달그락, 뚜껑을 여는 순간 가난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윤기 나는 흰쌀밥과, 그 옆에 놓인 차갑게 식어버린 꽁보리밥의 대조는 잔인할 만큼 명확했다. 같은 양은 도시락이라 해도 달걀 프라이 하나 얹어온 아이들은 그나마 ‘스뎅’ 쪽에 줄을 설 수 있었다.
반찬통이 따로 없어 밥 귀퉁이에 김치를 쟁여 넣어야 했던 내 도시락 바닥은, 언제나 김치 국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찐양은’임을 보여주는 증표로 그보다 확실한 건 없었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과시와 선망, 모멸과 비굴을 학습해야만 했다.
‘스뎅’들의 반찬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결이 살아있는 소고기 장조림, 노란 달걀옷을 입은 분홍 소시지, 호두알이 들어간 멸치볶음... 그 화려한 반찬들이 둥근 찬통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가죽 필통 같은 곳에서 숟가락 끝이 빗살처럼 갈라진 ‘포크 숟가락’을 꺼내 소시지를 찍어 올렸다. 나는 신문지에 둘둘 말아 온 몽당숟가락이 부끄러워,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도둑질하듯 몰래 꺼내야 했다.
‘스뎅’들은 보란 듯이 반찬 뚜껑을 열어두고 우리 ‘양은’들이 젓가락을 대도록 허락했다. 그것은 가진 자의 여유였을까, 아니면 까까머리 중학생의 순진한 시혜였을까. 그들과의 간극을 ‘우정’이라는 말로 메우기엔 내 열등감의 골이 너무 깊었다. 선생님조차 ‘스뎅’들에게는 더 환한 미소를 건네곤 했다. 심지어 내가 짝사랑하던 영어 선생님마저 ‘스뎅’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치받고 올라왔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글이 아니라 부모에게 들었더라면 좀 달랐을까. 자식에게 삶의 지침을 일러줄 여유조차 없을 만큼, 가난은 부모의 어깨를 무참히 짓눌렀을 것이다. 주인집에서 연탄을 꿔다 때고, 보리쌀마저 떨어져 매 끼니를 수제비로 때우던 그 시절. 가난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 악물고 짱돌 들어 맞서야 했던 골리앗이었다. 썩어가는 사과를 보며 가난을 잊었다고 자만하는 지금도, 가끔 멸치 육수 냄새를 맡으면 나는 순식간에 그 습하고 어두운 단칸방으로 소환되고 만다.
망각은 그저 잠시 진실을 가려두는 얇은 커튼일 뿐이다. 가난의 기억은 아물지 않는 흉터처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갈피에서 여전히 서늘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매주 목요일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자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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