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 난생처음 혼자 가는 해외여행
네 사주에 역마살이 세 개나 있다더라고.
몰랐던 내 사주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었다. 역마살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나 있다니. 저렴한 비행기 표를 찾겠다고 스카이 스캐너를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도 혼자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 지에 관한 확신이 없었는데, 뜬금없게도 그 이야기에서 용기를 얻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줄곧 겁이 많았다. 크면서 점점 나아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또 다른 불안이 섞여 새로운 종류의 겁을 내기 시작했다. 그건 사실 스무 살이 되고 처음으로 친구와 둘이 독일 여행을 가서 처음 느꼈다.
베를린에서 줄곧 머물다가 짧게 드레스덴으로 갔다 오려던 계획에 아주 사소한 문제가 생겼을 뿐인데, 낯선 타지에서 우리끼리 해결을 해야 한다니까 마치 절대 이겨낼 수 없는 난제에 부딪힌 것 같았다. 물론 결국은 아주 잘 해결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둑어둑해지던 저녁 즈음 친구와 숙소 앞 호수를 끼고 걸으며 눈물을 참기 위해 괜히 농담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 내가 울어버리면 친구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되는 것 같아서 울지 않으려 애를 썼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된 지 겨우 한 달 즈음 지났을 때였고, 내 마음은 여전히 아이에 불과해서 그랬겠지만. 그 순간에 책임의 무게를 체감한 것이 사실상 나에겐 새로운 불안을 알려주기도 했다. 난 이제 성인이고, 앞으로는 책임질 일이 더욱 많아질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겁이 많다는 건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약점이 된다. 늘상 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막상 가면 누구보다 좋아하면서도 계획을 구체화하다 보면 덜컥 겁부터 나니까. 왜 그런 생각은 항상 새벽에 하게 되는 걸까? 게다가 꼭 그런 시간대에는 여행 브이로그나 블로그 일기 같은 걸 봐도 매번 뭔가 문제를 겪었던 에피소드가 보인다. 이런 현상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도 있으려나. 아무튼 역시 못 가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잠들었던 나는 이튿날 아침에 다시 여행 브이로그를 찾아봤다. 그럼 새벽의 일은 자연스럽게 잊힌다. 음, 역시 여행을 가야겠다!
사실 삿포로에 가야겠다는 다짐의 시작은 별로 거창하지 않았다. 긴 겨울이 지나고 짧은 봄이 시작되나 싶더니 별안간 여름이 기웃거리길래, 겨우 4월에 날씨가 이렇다면 도대체 진짜 여름엔 얼마나 더우려나 싶은 공포를 느꼈다.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기 위해 작년 여름은 어땠는지 되짚어 보니 마침 제일 더울 때 사촌언니와 함께 미국에 갔던 것이 떠올랐다. 작년 여름 더위의 피크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여름은 더욱 덥게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이번 학기엔 휴학을 했으니 그 안에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너무 짧지 않게, 그리고 혼자서 가보자는 생각에 '여자 혼자 해외여행'이라는 키워드로 여행지를 추천하는 글을 많이 읽었다. 한참 찾으면서도 정작 결정을 못하던 도중, 삿포로는 덜 덥다는 엄마의 추천으로 별안간 삿포로에 가기로 결심했다. 더운 게 싫어서. 그리고 마침 시간이 많아서.
지독한 즉흥형 인간의 특징.
내 여행은 대부분 막연하게 꺼낸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스무 살에 갔던 독일 여행은 열여덟에 친구와 이야기하다 시작되었고, 작년에 갔던 미국 여행도 그로부터 세 달 전 갑작스러운 언니의 제안으로 성사되었다. 사실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만 해도 이게 실현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허황된 소망 정도로 여겼는데. 이번 삿포로 여행과 마찬가지로 매번 성사되었다. 이래서 말의 힘이 크다고, 아무 계획이 없어도 꾸준히 가겠다고 말하고 다니면 결국 이루어지나 보다. 비록 엄마는 얘기 좀 그만하고 제발 가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겁쟁이에다가 계획을 짜려고 하면 머리부터 아파오지만, 그럼에도 내가 삿포로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일상을 구축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휴학했지만 결국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으니까. 여행이 모든 것에 답을 내려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온전히 나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될 테니까.
어떤 겁쟁이들은 생각보다 무모해서, 겁내고 걱정하다가도 갑자기 부딪히는 쪽을 택하게 된다. 사실 그냥 내 얘기다. 나는 겁이 많지만 호기심도 많고, 가끔은 그 호기심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계속 그 생각만 하는 집착광의 면모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그냥 해보기로 했다. 어떻게 되든 간에.
삿포로에 갈까요?
겨울 삿포로에 가면 폭설에 차편이 끊기는 일이 잦기 때문에 겨울 삿포로에 가자는 말은 당신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일종의 고백이라고 들었다. 낭만을 사랑하는 나에게 엄청 큰 감동을 준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로 겨울 삿포로 여행을 꿈꿨다. 비록 나는 여름 삿포로에 가게 되었지만. 어찌 됐든 낭만을 담은 도시는 어느 계절에 가더라도 나름의 낭만을 담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갑니다, 삿포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