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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Feb 08. 2021

카이사르의 '대의' 와 '관용'

인간은 각자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수 있는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인간 역사를 봤을때 전쟁을 마치고 나면 반란을 사전예방 하기위해 적장들과 적들은 숙청을 당하고 정치에서도 정치보복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 에고들의 관례이다. 고대 전쟁사를 보면 정복당한 민족은 노예로 팔리는것이 상식인데 적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자국(로마)시민동등한 지위를 부여해주고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던 자들을 전쟁이 끝난후에도 그대로 정치에 복귀시켜준 인물은 역사속에서 카이사르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결과는 역사가 기록한대로 '암살'이란 비극으로 끝을 맺어 적들에게 베푼 관용은 인간을 오판한 카이사르의  '실수'였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를 미워하는 소인배 역사가 (?) 들의 시기와 질투심은 아직까지 근거없는 소문들로 이어져 오고있다.


카이사르의 인품에 대해 억감정을 지닌 후세의 유럽인들이 억지 추측으로 꾸며낸 말들과 실제 역사 기록간에는 많은 갭차가 존재한다.



가장 모순이 드러나는 부분은 카이사르가 난봉꾼 바람 둥이여서 원로원 의원 절반 가까이가 부인을 도둑 맞았다 라는 (거의 기정 사실처럼 인식된) 근거없는 소문이다. 


아무리 로마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사회라 할지언정 그런 사실들이 실제했다면 지도층의 엄청난 스캔들로 수많은 가정이 파탄나고 사건에 대한 머리끄댕이 난장판 기록들이 하나라도 있는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에게 사랑 받았다는 기록만 있을뿐 지저분한 애정스캔들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정치를 하면서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의원들의 부인들 대다수와 대놓고 바람피면서 그 바닥에서 살아 남는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일이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모든 원로원 부인들과 치적으로 (대립각에 서있는 남편들과의 완충역으로) 사이좋은 사교 우정 관계를 유지 하면서도 적정선을 유지했음을 추론 가능케 한다. 모든 여인들에게 친구이자 인간적으로 사랑 받으면서도 원만한 관계를 시샘하는 수컷들의 질투가 개선식에서 부하 병사들이 '대머리 난봉꾼' 이라 놀려대면서 그런 소문들을 만들어 냈으리라 본다. (특히나 카이사르의 초인적인 행적들을 봤을때 그렇게 바람피고 다닐만큼 시간이 한가했던 적이 거의 없다.) 


카이사르는 젊은시절, 술라가 권을 잡고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펼칠때 살고 싶으면 반역자 핏줄인 아내와 이혼 하라는 명령에 불복해 스스로 망명길에 올랐던 사나이다. 자신의 아내가 추문에 휩싸이자 카이사르는 가족들에겐 의심도 받아선 안된다며 바로 이혼을 할만큼 정도를 고집했던 인물이다. 그런 사실을 보면 어떤 외압에도 옳지 않다고 여기는 행동이나 정치적으로 위협이 될만한 짓은 할 사람이 아님을 알수 있음에도 수많은 미확인 유언비어들의 진위를 의심하역사학자가 한명도 없다는것이 상식적 이지가 않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성적으로 균형감각을 가질때만이 수많은 여성들을 상대해도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이런 관계의 조화가 가능하다. 결코 책임이 따를만한 조절못할 선은 넘지 않는것이다. 일반 남자들은 그런 사교기술과 욕망을 자제할 힘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 수준에서 오해들을 하고 질투들을 하게된다. 역사가들은 아직까지 일반 남여 관계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카이사르와 수많은 여인들간의 상식에 어긋난 연인설( 원로원 정적의 아내들과 대부분 바람 피었는데 단 한건 아무런 애증 문제가 없었다는) 관계에 대해선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치부해 버린다. 그야말로 '아님 말고'식이다.


*내 개인적 관점에선 카이사르는 요즘말로 남여간 '썸'의 애매한 관계를 정치적 으로도 이용할줄 아는 세련된 사교의 귀재였을거라 본다.


당시 유럽의 모든 야만부족들은 문명화를 강제로 행하는 침략자 카이사르를 미워했다..  카이사르가 아니었음 유럽국들은 바이킹의 후예랍시고 해적집단으로 역사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그 밖에도 2천년전에 있었던 인물에 대해 기록 어디에도 없는 사실들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기록되지 않은 많은 비공인 소문들이 카이사르 라는 인물에 대해 오해하게 만든다. 사실은 간질병 환자였다, 동성애자 였다는 설도 그렇고 심지어 영국 드라마에선 가상으로 동성에게 강간 당하는 장면까지 만들어 인격모독과 굴욕을 주고 싶어한다. 카이사르가 아니었음 대영제국도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굴욕적인 역사 앞에서 가상으로나마 정복자를 비하 함으로써 자존심을 챙겨 보려는것 같다. (시골 마을의 전사들이 멍청한 카이사르를 골탕 먹인다는 줄거리를 가진 프랑스의 '아스테릭스'도 마찬가지다.)


'왔어 봤어 이겼어' 공식 전쟁 보고서를 대수롭지 않게 단 세마디로 날린것에서 보듯 카이사르는 수많은 전쟁터에서  거친 막사 생활하며 보냈고 (갈리아 전쟁만 7년이다.) 공인으로서 자신의 행적을 전시중에도 그대로 기록에 남겼지만 한번도 증오에 휩쌓였다거나 적들을 미워 거나 했었 기록은 전혀 없다.


* 카이사르에게 인간에 대한 증오나 미움 같은 감정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것 같다. 욕망에 이성을 잃거나 기분에 취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거친 음식을 주어도 음식 투정하지 않았고 술에 취한 모습을 한번도 보이지 않아서 '설령 모든 로마시민이 술에 취해 이성을 잃어도 카이사르 만은 멀쩡했다.' 라고 당시 평가 기록을 보면 알수있다.


 빚을 진 원인중 하나도 (당시는 고가였던) 파피루스 책을 닥치는대로 사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실제 군대를 지휘하는 총 사령관 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을 제압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갖춘 천재중 천재로 너무 독보적 이었기 때문에 폼 잡을줄만 알던 귀족파와 원로원들의 눈에 가시였음은 분명하다.


내전이 끝난후,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 편에 붙어 자신과 싸운 사람들을 벌하지 않았으며 거취의 자유까지 허용하였다. 카이사르의 반대편에서 앞장섰던 당대의 지식인이자 달변가 였던 키케로가 처벌대신 관용을 베풀어 줘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자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답장을 썼다.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도 로마에 와서 내가 목표로 삼고있는 사업을 완성하도록 협력해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소. 조언도 좋고 충고도 좋소. 다른 사람들이 각자 장기로 삼는 분야에서 협력해 주어도 좋소. 나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누구의 제안이든 거리낌없이 받아 들였소. 지식이 풍부한 당신의 제안이라면 헤아릴수 없을거요."


* 카이사르에게 항상 적대적이었던 당대 최고 말빨이었던 키케로와 나눳던 편지들은 역사적 사료로 정확하게 남아 있으므로 위에 카이사르가 한말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대로 팩트 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존중, 카이사르의 관용적 행동을 이해 시키게 되는 말이다.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권력을 장악하자 태도를 바꿔 카이사르를 칭송하는척 하다가  결국 카이사르가 암살 당하고 바로 태도를 바꿔 다시 암살파를 지지했지만 반란이 실패하고 결국 카이사르의 후계 세력에게 처형 당한다. 


자신에게 맞섰던 모든 적들을 용서하고 지위까지 보장해주며 자신이 정복한 땅의 이방인들에게도 로마 시민권과 의회 자격권을 주었던 카이사르의 관용은 결국,암살의 칼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자신과 싸웠던 적들을 전부 풀어주고 복직 시켜주고 무슨 배짱으로 혼자 호위도 없이 다녔는지.. 인간의 선함을 과대 평가한것 대한 소인들대답이다.


*카이사르가 만약 소인들에게 암살 당하지 않고 권력을 잡아 생각대로 개혁을 추진했다면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거라고 추론해본다.



카이사르의 가장 큰 실책은 모든 정치가들이 자신이 품은 대의를 이해하고 자신과 같은 의식 수준일 거라고 착각한 이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한 사내앞에 자신들의 민족이 무릎 꿇었다는 역사적 사실때문에 무조건 감정적으로 인품깍아 내리고 싶어하는 (카이사르에 의해 야만족에서 강제로 문명화 되어버린) 유럽인들의 소인배 기질들을 보면 인간종이 얼마나 자신들과는 다른 대의를 지닌 위인들을 박해하고 시샘하는 치졸한 근성을 지녔는지를 알게된다. 그것이 사피엔스 에고의 본성인데 카이사르는 그것을 무시 했기에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대하고 관용을 남발하다 그 대가를 치룬것이다.


카이사르가 귀족들이 주축이된 공화제 에서 점차 제정으로 나아가려 했던것은 그것이 대의에 맞고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를 위한 최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평상시는 감추고 유언장에서 밝힌 후계자로 점찍은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역시도 친아들이 아니었다. (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정식 후계자가 된후 카이사르의 친아들인 클레오파트라 일가를 멸족 시킨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로마 시민들에게 나눠주라는 유언과 개인 빚으로 공공건물들을 지어 로마 시민들이 이용하도록 한점등 카이사르가 개인 권력욕이나 욕망에 심취한 흔적은 전혀 찾을수 없음에도 모든 기록들을 자신의 수준에 맞춰 해석하는 소인배들의 이해 수준으로는 역사를 제대로 알기가 힘들다.


역사 학자들은 무지한 개인 생각들은 빼고 입증된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기록해야할 책임이 있다. 대의를 모르는 소인배들이 자신들 의식수준에서 위인을 평가하고 무책임하게 추론으로 역사를 재단 한다는것 자체가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위험한 일이다.


카이사르를 모델로 삼은 말하는 원숭이 '시저'의 문명건설 SF '혹성탈출'


'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에 상륙하는 순간 시작 되었다. 독일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라인 강을 건너는 순간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알레시아를 함락시키는 순간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로마의 최고 통치자가 되는 순간 시작되었다. 서유럽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위기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순간 시작 되었다.' -윈스턴 처칠(영국수상)


* 인간의 약점에 대해서는 그토록 깊이 통찰한 셰익스피어 였건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리어왕'은 걸작이지만 '줄리어스 시저'는 실패작이다. - 버나드 쇼 (영국의 극작가 1856~1950)


Rondò Veneziano - Buon Natale, Mondo:

https://youtu.be/1dq4upD_p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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