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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Jun 16. 2023

도道는 악惡을 악惡이라 말한다.

생사를 결정짓는 선과악의 갈림길.. 카르마(Karma)


스스로 ‘선(善)’ 앞에 떳떳하지 않은 어설픈 영성족들이 흔하게 하는말이 ‘판단하지 말라’ ‘악도 선이다’ 등 해괴모호한 궤변들로 스스로의 무지를 포장 합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중간 과정에선 경우에 따라 꼭 필요한 말일수 있으나 모든 경우와 사람에게 해당되는 궁극적 진리인 ‘도道’ 는 아닙니다. 자신이 선악 참과 거짓을 구분못한다 해서 남도 모를거라는 교만과 단편적 착각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절대 그런 애매모호한 말장난 가르침으로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면 안됩니다. 지식이 많고 악보를 줄줄 외우며 선문답놀이 하는 자들치고 실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습니다. 일반 문화 사회계에선 그런자들을 ‘평론가’  라고 합니다. 평론가는 잘남을 내보이기 위해 껍데기 지식만 번지르 할뿐 아티스트나 선수가 아니므로 실전에선 무용지물 입니다. 피아노 악보만 외웠지 연주를 못합니다. (말로만 선악을 초월하고 우주를 들었다 놨다 합니다.)



살의를 품고 독극물을 탄 음식은 겉보기 누구나 먹음직 스럽게 포장하기 마련입니다. 상한 음식에 독극물 넣어봤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테니 말이죠. 궤변들도 겉으로 보면 마치 진리처럼 들립니다. 본인의 안목이 독극물 탄 음식이 맛있어 보이고 끌린다해서 먹겠다 한다면 좋을대로 많이 드시라는 말밖에 할말이 없습니다. 가족 연인이 아닌데 타인의 카르마를 궂이 떠안을 일이 없어요.


흡연이 그러하듯 독도 필요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몸에 안 좋다 아무리 말해도 몸에서 땡기고 알아도 본인이 피우고 먹고 싶은 욕망은 어쩔수 없습니다. 도박꾼에게 도박 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마나 입니다. 남까지 엮어 다단계 물귀신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니말이 다 맞는다는건 알겠는데… (그래도 난 이쪽이 자꾸 호기심 생기고 끌리는데) ”  카르마에 매달린 대다수 에고들의 행동들 입니다. 정답을 말해줘도 온갖 핑계를 대고 궂이 오답을 선택합니다.


*한국은 이미 지난 역사속 독소들을 모아 모아 만든 ‘고독’을 선택해 집단으로 집어먹은 상태입니다. 독인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선택 합니다.



수천년간 사멸되지 않고 한결같이 이어진 선악에 대한 상식들을 인간들은 [도덕. 윤리]라고 합니다. 초등 도덕과 윤리를 교육받고 지성을 지닌 인간이 선악 구분을 못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단지 본인의 마가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해 합리화란 색안경을 쓰게 만들고 진실을 부정하는 장님으로 만드는것 입니다.


모세의 [십계], 유교의[인의예지], 불교의 [육바라밀]


몇가지 안되는 각 종교의 선악 지침들은 수천년이 흐르는동안 단 한글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지키지 못하고 변명하기 위해 샛길을 찾으려는 엉뚱한 해석과 악의 입맛에 맞춘 변조가 수천년간 끊임없이 시도될 뿐입니다. (아예 죄인이라고 먼저 자백하고 구원 약장사를 하기도 합니다.)


악은 작은것 이라 해서 자신에게 허용할수록 점점 커져갑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악이라도 그에맞는 단호한 거부를 습관화 해야 내면에서 악이 자라는걸 방지할수 있습니다. 악을 보고 그 정도쯤 스스로 허용 하다보면 점점 커져서 결국은 변명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상황이 됩니다. 에고가 교활한 마귀로 변해가는 과정입니다.



작은 악은 작은 타이름이면 충분합니다. 대응이 과하면 역작용을 일으킵니다. 아이가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때 타이름이 아닌 회초리나 징벌을 가하면 아이는 트라우마를 입습니다.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지적질은 상처만을 주고 받는 무식한 짓입니다. 상대에게 조언을 해야 한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 입니다.


타인과 관계에 있어선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상대가 잘못된 선을 넘을때 확실하게 No 라는 의사를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확실히 인식하고 더 이상의 선은 넘어오지 않게 됩니다. 상대가 선을 넘는 원인제공을 스스로도 하지 말아야하며 부부간에도 서로 지켜줘야할 선을 예의 에티켓 이라 합니다. 항상 상대가 정한 선을 넘지 않으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남이 모르고 못본다해서 죄를 저지른것이 용납되는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성숙엔 절대 공짜나 요행이 통하지 않습니다. 내면의 마귀를 소멸 시키고 육체를 정화할때 갖은 유혹과 갈등에도 죄를 짓지 않았다면 때벗기듯 쉽게 정화가 가능하지만 이미 죄를 실행에 옮겨 저지른 상태에선 정화와 함께 본체도 타격을 받게 됩니다. 의식을 지배하고 몸에 새겨진 카르마 때문입니다.


액션 영화를 보고 즐긴다 해서 누구나 살인 폭력범죄를 저지르게 되진 않습니다. 모든 죄악은 갈등이 아닌 선을 넘어선 행동에서 나옵니다. 예로, 색마의 유혹과 타인을 해하고 싶은 분노는 누구나 가질수 있고 그 마음만 다스리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겨 부정을 저지르고 이미 상해를 입혔다면 사건이 되는것이고 그에 따른 피해보상과 처벌을 받아야만 사건이 종결이 됩니다.



생활속에서 마와 요귀들을 가지고 오욕칠정 놀이를 적당히 즐기면서도 시간날때 가끔씩 내안에 자라난 작은 요귀들을 핀셋으로 뽑아내 소멸 시킵니다. 세수하듯 반복 규칙적 입니다. 대부분이 스스로의 못남으로 인해 마가 변조된 요귀들 입니다. 가난하고 늙고 병든자들은 누구나 몸에 지니고 있는 요귀들로 특징은 못났고 술맛을 좋게 만들기 위해 안주삼아 한탄과 징징거리기를 좋아합니다. <투덜리우스> 딱맞는 멋진 별명입니다. 그러나 투정을 아무리 부려도 놀이를 즐길뿐 사고를 저지르진 않습니다. 단지 반복돼 굳어지면 스스로 주인이라 착각하게 되고 관성의 법칙을 따라 습관과 ‘성격’ 을 형성하게 됩니다.


원활한 사회 생활을 하려면 게임과 영화를 즐기듯 적당한 요귀들이 양념으로 필요하지만 항상 가볍게 농담하고 인형 소꼽놀이 차원에서 통제 가능해야 합니다. 요귀들이 자신이 주인인양 감정을 지배해 선을 넘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질투하고 늙은 부자는 건강과 젊음을 질투하고 열등감에서 발생되는 질투는 온갖 조잡한 요귀들을 발생시키고 끌어들입니다. 그 요귀들에 휘말려 죄를 짓는가 매일 세수하듯 묻은 때를 씻어내고 정화하는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도를 추구하는 자라면 꿈에서라도 조심해야 하는것이 <교활>과 <교만> 이라는 대마귀의 유혹과 홀림입니다. 현대인들은 교만을 리더쉽이라 말하고 교활함은 능력이라고 착각합니다. 교만과 교활함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얼마던지 긍정적 방향으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가 지배하는 영역이므로 힘을 가진자 일수록 교만이 자라나 행동에서 부정과 죄를 저지를 확률이 많아집니다. 힘이 없는자는 교활해져 스스로 죄를 얻고자 할 확률이 많아집니다. 교만한데다 교활하고 사리사욕에 악까지 추구한다면 그야말로 인간마귀라 해도 될것입니다.


내면의 요귀와 마귀의 정화도 카르마가 남아있다면 어쩔수 없이 그에 대한 빚 정리를 하고 난후에야 가능합니다. 카르마가 그래서 무서운것 입니다. 카르마에 대한 무지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카르마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선 정화도 한계가 있으며 그 이상 선을 넘으려할땐 마귀와 함께 본체인 목숨도 함께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수 있습니다. 자격미달 어설픈 자들이 힘만 믿고 벌리는 ‘여의주’ 쟁탈놀이가 항상 폐인 내지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 색마의 유혹, 돈과 권력의 유혹.- 예외 없이 거의 이 세가지 마의 홀림을 넘지 못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권력에 취해 자칫 그릇된 집단 카르마의 줄기가 되면 수많은 이들을 폐기처분으로 몰고간 그 죄질 또한 무겁다 할것 입니디.



‘도(道)’의 중심으로 다가설수록 티끌하나 없이 투명한 거울앞에 투명하게 설 자격이 되어야만 합니다. 흉폭한 상어 죠스가 바다속에서 아무리 교만하고 왕노릇 한들 바다와 파도에 맞설수는 없는법 입니다.


죄악의 크기는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가진 힘과도 비례합니다. 힘에는 그만한 책임 또한 따르는 법입니다. 선생의 그릇된 가르침 말한마디와 학생의 잘못은 크기가 다릅니다. 지도층의 잘못과 일반 시민의 잘못은 같은 행동이라도 죄질의 크기 자체가 달라집니다. 국가 지도자가 술먹고 욱하는 성질을 못참고 전쟁을 벌이면 수만명이 의미없이 희생되기도 합니다. 일반인처럼 사과하고 끝날일이 아니게 됩니다.


잘나가는듯 힘을 가진자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면 분명히 그에 합당한 선을 넘어선 정화되지 못한 카르마와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죄가 성립돼 있을것 입니다. 때로는 무지함 자체가 죄가 되기도 하고 분수를 모르면 불나방처럼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는 경우도 생깁니다. 놀부가 박을타듯 요행으로 도를 얻으려 하는자들이 그렇습니다.



’ 도道 를 만나려 한다면 온갖 유혹에 끌려도 죄악의 선을 넘지 않는다‘


선함을 조롱하고 이미 죄악이 생활화된 사람들에겐 공염불 같은 말이지만 선과 도를 추구하는 자라면 말세기엔 특히나 명심해야만 할것 입니다.


* 소금 품귀 현상과 이상기후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곧 마귀들의 난징판이 벌어질 조짐입니다 .“깨어있으라 곧 다가온다” 입니다.


https://youtu.be/ZnxAvkUI72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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