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랑거철 (螳螂拒轍)‘ 을 신경쓰지 않는다.
달리는 수레를 막겠다고 사마귀가 날을 세우고 맞서는 행동을 사자성어로 ‘당랑거철 (螳螂拒轍)‘ 이라 한다. 스스로는 용감함에 대한 자부심으로 거들먹 거려도 한마디로 큰 흐름에 작은 오기로 맞서는 무모한 어리석은 행동을 말한다.
티벳 불교에서는 ‘파드마 삼바바’ 를 인간 자궁에서 태어난 석가모니가 육체의 한계를 절감하고 슈퍼 육체로 업 그래이드 하기위해 연꽃에서 재탄생한 것으로 믿는다. 석가모니가 죽기전에 한 예언을 통해서다. (마징가 제트가 그래이트 마징가로 업그래이드 한것과 같다.)
파워풀한 파드마 삼바바를 당대엔 악마로 사람들이 두려워 하고 지금도 티벳 불교를 밀교로 이단시 하는 이유는 일반 인간 상식에서 이해되지 않는 파드마 삼바바의 엽기적 행동들 때문이다.
살인도 주저없고 사람의 시체를 파먹고 불에 태워도 죽지도 않고.. 평범한 인간 시각에선 충분히 두려워할만한 면모들을 보이기에 중생들 입장에선 붓다로서 존경하기엔 좀 약하더라도 이전 버전인 석가모니가 좀더 소화해내기 (장사하기) 무난하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적어도 석가는 사람은 안 죽이니까..
파드마 삼바바가 이루고자 하는 대의에 소소한 개인적 카르마를 들이대 봤자다. 달리는 수레앞을 막아선 사마귀의 죽음은 사마귀의 잘못인가 수레의 잘못인가.. 할일없음 논의해도 된다. 파워풀한 붓다이자 죽음의 마왕 파드마 삼바바 앞에서 잡스런 부량아가 거만하고 말종 행태를 부리는 행동을 ‘당랑거철’ 이라 표현해도 무리는 없을듯 하다.
기독교도 이해하기 난해한 예수의 직계 제자들의 가르침인 ‘그노시스’ 파를 이단으로 규정해 사자밥으로 던져주고 노동계급에서 자기들 수준에서 받아들이기 무난한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란 단순 교리를 세워 정통이라 주장한다.
“내살을 먹고 피를 마셔라” 예수의 이런 해괴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만한 지능이 일반 원숭이들에겐 없기 때문이다. 파드마 삼바바의 가르침이 밀교로 숨었듯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 하려는 ‘그노시스’ 파 역시나 밀교로 숨어 들어 일반인들은 접할수 없다. (결국 불교도 기독교도 정작 대중들이 이해하기 껄끄러운 실체는 전부 이단으로 몰아 지우고 대중들 입맛에 맞춘 껍데기만 가지고 장사 빼면 아무것도 할줄 아는게 없는 집단이 되버렸다.)
시골에서 생활하면 여름엔 하루에 수천마리 벌레들 살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야만 정상 생활이 가능해진다. 살생에 관련된 카르마고 뭐고 없다. 동종끼리나 생명이 소중하고 선악 가려가며 카르마 놀이를 하는거지 하루에도 식량으로 수백 수천의 생명을 소비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들 사회에선 전쟁이 그러하다. 삼국지의 영웅들은 전장에 한번 나가면 수천명 죽이는 전투를 일과처럼 수십년 한다. 질서가 잡히기 전 난세란 그런것이다. 개인적 감정 보다는 대의적 흐름을 타기 때문에 집단 카르마가 움직이고 그 안에서 개인의 잡스런 사주나 카르마 들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흐름에 맞서면 쓸려나갈 뿐이고 국운과 전운의 큰 흐름을 타야 살아남게 되는것이 전쟁의 룰이다. 무엇보다 병사는 개개인 운이나 전투력 보다 어떤 리더를 따르는가에 따라 군대 전체가 몰살 되기도 하고 승리의 기쁨을 얻기도 한다.
전시에도 모든 고난과 시련이 하늘이 주신것이고 하늘의 뜻이니 무조건 순종하고 달게 받으라는 테레사식의 가르침과 설교는 맥없이 그냥 죽으란 말과 다름없는 말이다. 사명대사도 일본의 침략앞에서 목탁대신 의병이 되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때거지로 죽여 조미료 젖갈로 김치 맛을내는 새우들에게 죄책감을 갖는 인간은 없다. 생명의 소중함 이따위 말장난은 전쟁과 대자연 앞에선 인간이 꺼낼 논제가 못된다.
하늘이 정한 ‘귀일’ 의 열차가 달리기 시작할땐 이유 같은것 따지지 말고 그냥 합류하는 길만이 살길이다. 붓다나 예수가 일일히 전 인류를 상대해 상담해주고 심사하고 가려서 구원해 줄만큼 한가하지 않다. 종교들이 설파하는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식 설교와 교리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코로나때 그렇게 구원 외치던 장사꾼들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침묵한것 보면 알것이다.
만가지 법이 제각각 당랑거철 식으로 대세의 흐름에 맞설것이 뻔하지만 자신들 교리와 나름 진리를 떠들어봤자 웅성웅성 소음밖엔 안된다. 개가 짖는다해서 전진하는 탱크가 멈춰서는 일은 없다. 가축 전염병 돌때마다 수백만 마리를 생매장 하면서 자신들은 그런대접 받아선 안된다고 대자연 상대로 만가지 법 들이대며 때로 설교해 봤자 자연은 모든 교활한 인간의 논리를 무시한다.
남들이 말해줘봤자 소용 없는것이 결국 안목과 선택의 차이가 귀일 열차에 탑승 하느냐 마냐인데 남따라 올라타도 자격이 안되면 스스로가 불안해 내리게 된다. 자기식의 변명이 올라타도 주변의 만법중 한가지 유혹에 끌려 내리게 된다.
막바지 차와 감으로 자신의 선택이 맞다고 우겨댈수 있는 시간 또한 매우 짧을것이다. 바베큐 파티를 즐기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논하는 말장난을 즐길만큼 여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 열차는 지나가고 당랑거철의 결과는 보나마나다. 길에서 사마귀는 마술처럼 사라질 것이다.
시골에선 수천마리의 곤충들이 온 사방에 피칠갑을 하고 눌러 붙어 죽어 있지만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집안 대청소라는 대의 명분에 날파리와 하루살이의 생명 따위에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벌레들이 뭐라 항변하던 그저 휴지와 물티슈 걸레로 쓸고 닦을 뿐이다.
지구의 정화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편에서 일일히 추억 챙겨주고 사랑 자비 들먹이며 토닥여줄 시간대가 아니다. 다른 성인들과 달리 당대엔 악마라는 비난을 받고 죽음을 설파한 파드마 삼바바의 진가가 드러날것이고 사람들은 진정 붓다의 완성형이 무엇인가 알게될것이다.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그노시스’ 의 진실도 파드마 삼바바의 지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설명해봤자 이해 못할것이고 설령, 이해한다 해도 자격이 안 되면 남 얘기일뿐 무용지물에 독이된다..
대부분 이래저래 줏어들은 말로 깨달은양 자랑 하는건 누군가 스마트폰을 개발해서 쥐어주면 자신도 (아마) 사용할수 있을거다 라는 말이다. 격동의 시대를 실시간 살면서 실제 스티브 잡스와 개발진들이 직접 답을 찾아 헤매면서 스마트 폰을 만들며 얻는 지식은 일반 대중들과는 질이 다르다.
건방진 사마귀가 만법귀일의 달리는 열차앞에서 철 모르는 테레사처럼 자신의 아집들 가지고 따지고 들수록 스스로 내리고자 하는 이유만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것 따지지 말고 그저 열차에 올라타란 말밖엔 할말이 없는 것이다. 반도체 기술을 이해까지 안 바래도 스마트폰 쥐어줌 쓸줄만 알아도 다행이다.
그나마 그것도 ‘귀일’ 열차를 알아볼 안목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안목은 생각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릴적 헤어져 본적이 없어도 부모 자식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는 코드가 있다. 알아보는 자가 타는것이고 공부좀 했답시고 어설픈 지식과 생각으로 고르는 자는 분명 오답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