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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Sep 14. 2023

‘선[善]’과 ‘악[惡]’의 경계선에 선 마음

근본의 선을 택하라.


‘선악[善惡]’의 경계선에서 어느쪽을 따를것인가를 마음이 결정한다. 올바름이 ‘선’이고 그릇됨은 ‘악’이다.문제는 어느쪽이 선이고 악인지 애매한 기준으로 사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 실체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다.


악한 마음으로 선한척 연기 하는것은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행하지만 선한 마음으로 악한 행위를 하기는 쉽지않다. 보통은 자식 잘돼라 꾸짖는 부모마음 정도이고 조직에서는 총대메고 대의를 위한 악역을 자처하는 책임자의 역활이 때론 그러하다.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선함이 악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흔하다. 어린 학생이 선생을 구타하고 교권이 완전히 박살난 현실은 표면적 선함만을 강요하다 선악이 뒤집혀 발생하는 현상이다.



악한 마음으로 선한 연기를 하는 모습은 일상적으로 너무나 흔하다. 말세기 대부분 종교 정치인들 행태들이 그러하다. 모든 종교가 그럴듯하게 선함을 말하고 모든 정치인이 애국을 논하는데 실제 드러나는 행태와 망해가는 현실을 보라. 선하게 보이는 일상 관계들이 각자의 이익앞에선 그 본심이 드러난다.


모두가 자신이 정의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편을 갈라 대립한다. 각자의 선에대한 기준이 이익따라 발생한다. 때론 악함을 포장하고 명분을 얻기위해 그럴듯한 집단 프래임을 만들어 낸다. 판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의식 이라는 프래임에 판단을 의존한다. 사람들 많이 몰린쪽을 따르는것이 최선이라 믿는다. 대세를 조종하기 위해 지지율을 조작하고 언론을 장악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성을 말살하기 위한 집단 전체주의, 상대를 무조건적 악으로 규정하는 공산당과 나찌 파시즘이 가능한 이유도 그래서이다. 집단의식이 악을 선이라 지향하면 개개인이 아무리 선해도 악함의 일원이 된다.


집단 대립의 극한이 전쟁이다. 전쟁은 개개인 선악의 영역이 아니다. 대의적 선을 위해 자신이 살기위해 수많은 살상 행위와 희생이 따르게 되고 적을 많이 살상할수록 영웅이 된다. 살생의 악함 보다는 승리를 위해 얼마나 적절한 행위 였는가가 옳고 그름을 좌우한다.


살기위해 상대를 무조건 죽여야 하는 전쟁에 있어 사람들은 숨겨진 선함과 악함을 구분하지 못한다. 포퓰리즘으로 전쟁을 하자고 선동하는 자보다 막으려는 자가 영웅이 되어야 하지만 사람들 판단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정작 싸워야할땐 숨는 비겁함이 악이다. 피할수 없는 전쟁에선 아무리 대의적 선인 애국을 위해서라 해도 살생에 따르는 트라우마를 겪게된다. 승리해도 수많은 이들이 전쟁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는 경우가 수두룩 하다. 싸우지 않고도 최소한의 희생으로 이길수 있다면 가장 궁극적 선을 행하는 것이다.



수많은 프래임들이 집단의식을 포집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다. 현대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무조건 선쪽이라 믿는다. 많은 약자들이 악함에 대항하는 분노보다는 순종 하는 비겁함을 스스로는 ‘선함’이라 착각한다. 힘을 가진 악이 약자를 괴롭히는것을 보면서도 대부분은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외면한다. 판단을 못내릴땐 대립 자체를 양비론으로 치부하고 문제에서 피하려 한다. 비겁함이 선함이 될수없다. 그런자들이 투표로 만들어낸 정권이 지금의 권력이다. 거짓된 프래임에 속았다 변명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동질감이 프래임에 의존하게 만든다.


열사들을 조롱하고 정의를 비웃는자들 대부분이 스스로가 악함을 인지하지 못한다. 악이 힘을 가지고 권력을 장악할때 정당한척 더욱 거침이 없다. 권력을 가진자가 개인의 취향을 올바른 정의라고 믿는것이 독재의 가장 큰 위험성이다. 집단을 전체주의로 만들기 위해 프래임을 만들고 ‘이념’으로 포장한다. 종교처럼 논리적 모순에 대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믿음과 신념을 강요한다. 믿음과 신념은 명령으로 생기는것이 아니다. 민심 이반으로 막바지 위기에 몰리면 전쟁 위협으로 혼란을 부추겨 국민들의 판단을 차단한다. 악이 애국심을 가장할때 선함도 악으로 이용된다.


* 5공시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평화의 댐이 그렇게 만들어 졌다. 03말기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북한에 총을 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자신이 정의라고 주장하기위해 의인들을 모함하는 부류는 역사까지도 왜곡하려 든다. 그런자들의 프래임에 빠지면 나라 팔아먹는 매국 행위에 동조하면서도 스스로는 애국이라 착각한다. 정의를 수호해야할 검경이 반대로 선을 탄압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정의 라고 주장한다.


그 모든 가치관의 혼란과 모순들에 대해 궂이 이유를 찾는다 한다면 말세기라 그런것이다.  왜 사람들이 망할짓을 할까에 대한 답은 ‘망할분들’ 이 ‘망’ 을 하기위해 그런것이다. 필연적으로 망할것들은 망할짓을 망할때까지 한다. 집단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고 망할길로 간다면 살아남기 위한 각자도생의 좁은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근원적 선함을 추구할수록 망할것들이 확연히 보일것이다.



말세기 에는 계층별 소수의 정의가 아닌 범 지구적 생태계 전체적 균형의 ‘선악’을 따라야 한다. 즉,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이 아닌 근본적 진리로서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의 선악은 어린아이도 판단할수 있을만큼 단순하고 상식적이다. 만법이 귀일하는데 복잡한 이론이 필요치 않다.


오로지 근본적 선함에 대한 갈망만이 키를 얻게되는 원동력이자 매달려야할 구원줄이다. 선함에 대한 끌림이 없으면 탈출구가 있어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무지한 자들은 힘있는 자들이 짜논 프래임에 갇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못할것이다. 근원적 선함을 추구하지 않음에 그러하다.


말세기엔 특히나 마음 먹은대로 이룰수 있다는 시크릿 류의 조잡한 자기개발서 들을 조심해야 한다. 욕망을 부추겨 망함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될수도 있다. 악에대한 면죄부를 준다는 종교도 의심해봐야 할것이다. 마음의 위안을 얻겠다고 잘못을 정당화 하는것을 ‘도[道]’라 여기지 말라. 악행에 대한 위안이 ‘도[道]’가 될수없다.



말세기를 통과해 나가는 가장 현명한 수칙 No1.


 - 오로지 근원의 선함에 대한 갈망과 기도를 하라. 생명계에서 선함은 생을 의미하고 악은 사망을 의미한다. 정도에서 순행과 역행을 구분해야 한다.


길은 찾는자에게 보이게 된다. 진심으로 구할수록 아낌없이 구하게 될것이다. 올바른 ‘도[道]’를 구하려는 마음이 없을뿐이다.


인류가 멸종돼도 대재앙 앞에서도 대자연은 항상 아름답고 생명은 언제나 기적 그 자체로 경이롭다. ‘도[道]’의 모습이 그러하다. 생명은 마음을 따르지 않으므로 마음이 대자연의 ‘도[道]’와 생명을 따라야만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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