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을 위한 필수장착 두가지 아이템
악어를 악어로 보고 원숭이를 원숭이로 보는것은 그 종이가진 특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습성이 일괄 분류로 규정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종이 가진 한계틀을 ‘매트릭스 (Matrix)’ 라고 부른다. 인간에게도 신들이 짜논 우물속에서 개구리처럼 한정된 의식의 틀안에 갇혀 있음을 일깨워준 영화가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 이다. 매트릭스 영화가 영화사와 인류의식에 남긴 위대한 점이 그 때문이다.
같은종은 동종의 매트릭스 규칙을 따른다. 그것을 본성이라 한다. 착한 악어 지성적인 악어 구분없이 애완용 이라해도 악어는 신체 접촉을 피해야하고 돼지는 머리좋은 돼지 감성적인 돼지 안 따지고 육질로만 등급을 매겨 잡아 먹으면 된다. 돼지가 아무리 지성을 지녔다 한들 사람과 소통하고 수학문제 푸는 돼지가 아닌담에야 그놈이 그놈이기에 인간에겐 살찐놈이 최고다. 인간이 단순 노동에 부려먹을 만큼 지성을 지닌 동물이 그나마 개나 말이기에 개와말은 고기를 목적으로 사육 하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수 있는가?
각자가 지닌 판단잣대를 밑도는 행동들에서 스스로도 같은 종에 속해 있다는 자괴감이 분노를 유발하게 된다. 인간의 사악함과 무지에 대해 계속 한탄을 하다보면 결국 그 이유에 대한 원인과 정답을 발견할수 있다. 실망과 원통함 인간에게 입는 마음의 상처에 대한 위로를 원한다면 그 답은 인간에 대한 판단 기준점을 잘못 잡았다는 것에 기인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 종들과 다른 점은 위 아래로 그 한계가 미지수란 점이다. 끝을 보려할때 어디가 끝일지 알수가 없다. 인간이 신의 뜻을 펼칠수 있는 도구로 동급의 ‘자유의지’ 를 부여받았기에 그렇다.
인간의 집단의식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맞물려 시대적으로 계속 변해간다. 지금시대 인간종과 과거의 인간종은 같은 부류가 아니다. 위로 확장은 멈춘대신 아래 커트라인은 계속 깨트리는 자들이 출현해 확장중이다. 짐승들도 안하는 짓을 서슴없이 해댄다.
과거엔 부모 자식간 살해는 인간으로서 상상도 못할 선이었지만 현대는 그 커트라인도 낮춰졌다. 인간은 가족끼리도 성폭행하고 죽이기도 하는 종이다. 선생을 폭행하는것도 가능한것이 인간이다. 과거엔 불가했던 것들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품종이 점점 하락하는 현상이고 본성이 점점 사악해져 간다는 데이터들이다. 적어도 같은 종끼리 잡아먹는 야만 수준은 아니란 점에서 아직 최하는 아니다. 다른 먹을것들이 널려있기에 그럴수도 있다.
똑같아 보이는 종이지만 실제로는 아예 동물적 존재로 추락하던가 위로 신적인 존재로 등급업 하는가 양단간 갈림길의 기로에 서있는것이 말세기 현 시대의 인간종이다.
평시는 위로 진화를 못하겠다면 최소 보수적 관점에서밑의 커트라인을 지켜 퇴보만은 피해야 하겠지만 말세기에는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지구적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어디로든 향해야 한다. 인간성 커트라인 기준이 시험대에 오른다.
생사를 결정짓는 갈림길에서 전진이냐 후진이냐 국운은 후진을 선택했지만 환경은 암울해도 개개인 선택은 그 안에서도 아직 완전히 확정된건 아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인간의 선택권은 달라질수 있다. 뒷골목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다 해서 모두 범죄의 길로 가야 하는것은 아니다. 죽을병에 걸려도 확률이 적을뿐 100% 사망률 질병은 흔치않다. 매트릭스의 집단의식을 따르지 않을때 외톨이 왕따가 될수있고 변종 취급 당할수 있다. 그렇다고 그릇된 길로 망해가는 집단의식을 알면서도 따를수는 없다. 집단의식이 잡아끄는 힘을 뿌리칠려면 그만한 결단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위한 진화의 근본은 [의로움]이다. [용기]라고 하는 추진력을 얻어야만 전진으로 나아갈수 있다. 단순 생존만을 위해,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비겁함을 택한다면 퇴보해 후퇴할 확률이 더 크다. 닭들이 왜 날지 못하는 조류가돼서 인간의 식량종이 됐는지를 고찰해 보라.
앞으로 다가올 구간에서 전진을 원한다면 필수적으로 ‘의로움’과 ‘용기’ 라는 아이템을 얻고 장착 해야 한다.
https://youtu.be/-bkvEEACkKM?si=2w9Dvy2eTJUAtgIJ
행동함으로 얻게되는 내면의 힘은 행동하지 않으면 절대 지식으론 알수가 없다. 사랑이 그러하고 분노가 그러하듯 용기 또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으로 운동을 잘할순 없다. 의로움과 용기도 그러하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행동으로 나선 사람들을 우리는 ‘열사’ ‘의인’ 이라고 부른다.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홍범도 장군같은 위대한 용기가 없다면 그들이 가진 의로움을 지지하고 따르기라도 해야한다. 마음은 이미 어느쪽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것이다.
자신들이 그럴수 없음에 의인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야비함도 인간의 악한 본성중 하나이다. 집단의식에 기대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행위를 즐긴다. 죄인을 지목해 희생양 삼는 마녀사냥은 인간의 가장 비열한 습성중 하나다. 적이라 할지라도 야비함으로 상대할 이유는 없다. 법정이 내리는 사형도 감정으로 처리되선 안된다.
불의에 항거,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어도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가족들 앞에서도 조롱하는 사람들 보면서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수 있을까 분노하지만 그것이 인간종이다. 사람같아 보이지만 다 같은 사람은 아니다. 전진하는 그룹 후진하는 그룹, 말세기 생존의 위기앞에서 의로움과 야비함을 따라 위 아래로 종이 갈리는것을 시대가 지켜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