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 방문하는 카르마의 흔적
나이 먹고 평화를 얻기가 정말 힘들다.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와 매일 안부통화를 할때마다 반복되는 대사들. 하루한번 나에게 전화걸어 외부의 간식주문 하는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일상 업무(?)이다. 가장 고령으로 요양원에서 제공하는 특혜 (개인 냉장고와 외부음식 반입) 가 3년째 이어지고 있는중인데 나와 하루만 통화가 안돼도 아버지는 불안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나를 찾는다.
“별일없지? 네 아버지도 별일 없으시죠? 응 나도 잘 있다. 오늘 날씨가… 드시고 싶은거 말씀하세요”
그 다음은 어머니.. 돌봐 주시는 분도 70대 할머니 인지라 (두분다 청소기 해체를 못한다.) 주기적 장봐 드리고 TV 리모콘 하나만 안돼도 달려가 봐 드려야 한다. 그 다음은 아침마다 빨리 일어나 빗질해 달라고 거실에서 양양대는 녀석.. 녀석이 저지르는 온갖 난장을 청소하며 나 자신을 케어할새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데
심오한 주제보다 사람들은 별일 없는것에 더 관심이 많다. 한가한 시간에 고양이와 노닥대는 얘기 남기면 수천명이 몰려온다. 실검 쫒고 연예인 얘기쓰면 수만명 방문한다. 그것이 대중의식이고 집단평균이다.
그저 오늘도 무사히.. 햇살이 점점 좋아지는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바라는게 고작 그정도 작은 평화 일지라도 그런 평화마저 허락치 않으려 찾아 드는것이 카르마다.
아닌밤 홍두깨처럼 헤어진지 25년이 흐른 싯점에서 옛 여친이 날리는 술주정 바가지를 일방적으로 당한다. 자려다 전화로 마냥 죄인처럼 수그리고 술취한 옛연인을 달래야 하는 일이 연례 행사처럼 벌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여인은 변모를 한다. 소녀에서 여인에서 바가지 아줌마로 전혀 다른 종이 된다. (왕년 청춘 스타들 늙어서 예능 나오는거 보면 알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여인을 기억하는데 돌아오는 현실은 끔찍하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중년 아줌마의 추억 망가뜨리기 공격.. 억지로 간신히 평화롭던 마음에 깡패처럼 쳐들어오는 과거의 흔적들. 카르마의 칼날이 그나마 아련한 젊은날 좋았던 모든 추억을 구석구석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사랑의 기억은 그렇게 부서지고 원래의 무로 환원되는 것이다.
’너 천하에 나쁜 죄인은 듣거라!‘
그녀가 멋대로 창작한 소설속 천하의 나쁜놈이 되어 응징을 당해야 하는것도 그런데다 나이들어 추억속 그녀의 소녀다운 품격이 망가짐을 보는것이 서글프다.
우울증 걸린 엄마가 이혼한 아버지에게 소설쓰며 수십년 공격해 대는것과 똑같은 패턴이다. ‘집안의 모든 불행은 너의 아버지 때문이다’ 송인데 캣츠의 메모리 처럼 본인에겐 명곡이 되어 죽을때까지 반복 재생되는 아집의 굴레를 본다.
주위에서 듣던 소문이 세월따라 조금씩 변형되고 점점 살이붙고 혼자 상상하고 결론내리고 그렇게 스스로 위안받기 위해 서사가 짜맞춰진 소설임에도 변명할 의욕이 안 생기는것이 그런 아집에 필요한것은 진실이 아닌 단순한 심적 위안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아야할 카르마의 수거라는 차원에서 보면 헛소문에 누명을 써도 억울할건 없다.
경주에 봄날 벛꽃놀이 가서 옛 친구랑 만나 옛날얘기 하다 유치찬란 하게도 갓 성인된 20살 시절 누가 먼저 좋아했냐 누가 더 좋아했냐 그때 어울렸던 친구앞에서 60 바라보는 나이에 따져 보자는거다.
단지 서로가 어려서 몰라서 표현하는법을 몰랐을뿐.. 일방적으로 내가 받기만 했던건 사실이다. 당시엔 내돈으로 옷이나 물건 사본적이 없고 (학교 다니고 하느라 서른살 되기까지 돈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철이없어 그냥 원래 그런줄 알았다. 그녀가 꽃한송이 못받아 억울하고 서운하다는 말 당시에 서로 얘기안하고 알아주기만 바랬던 쌍방 잘못이다. 지금에 와서 되돌릴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데.. 심야에 자정넘어 전화 통화를 할때마다 심란하다는 표현 그대로다. 침대에서 일어나 줄담배피러 마당에 나올수 밖에..
“ 정확하게 얘기해줄께 내가 너보다 열배는 더 사랑했고 더 가슴 아파했어 단지 표현을 안했을뿐이야. 그게 진실이야”
가진 사랑의 깊이와 소질이 없어 연애를 잘 하고 못하고는 별개의 사안이다. 그녀가 지닌 나에대한 모든 억울함은 중년이 되면서 겪게되는 상실감에서 오는 마음의 방황 때문이다. 대부분 갱년기 우울증 이라 진단받는다. 젊었을때 잘 나갔다 자부하던 여인네들에게 특히 심하다. 반대로 중년이 넘어가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경우도 많은데 보통 젊은시절 고생을 많이한 경우 그렇다.
물질적 보상이 젊은날 모든 잘못에 대한 상처들을 해결하리라 보진 않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음을 자각하는 나이가 중년이다. 젊을땐 내일이 있다로 일단 미루고 퉁치는데 중년은 그게 잘 안된다. 내일이 곧 말년이기 때문이다. 노부모를 보면 알수있듯 햇살이나 쬐면서 그저 오늘도 무사히.. 아무일도 없음이 이어지기만을 바라는것이 노년이다.
젊은시절을 같이 통과했던 남여 동지로서 같은 중년의 위기와 우울함을 공유 한다는것이 그나마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가 느끼는 의리고 연대감이다. 나와 헤어지고 25년간 인생을 함께 지낸 현 남친과의 사이가 본인은 자랑해도 (나와의 상처를 지울만큼) 현재 썩 행복하진 않다는 반증 이기도 하다. 서로 눈앞의 행복하지 않은 답답한 현실을 신세타령 하며 누구탓이다 해봤자 술맛은 좋겠지만 술 안먹는 나는 어쩌라고..
철없던 시절 젊은날 연애의 씁쓸한 결말이 어찌 이리 오래 지속된단 말인지.. 수천년묵힌 상처가 남긴 카르마의 꼬리란게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