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들 속에서 현실을 보다.
꿈은 현실을 토대로 감정이 느꼈던 잔재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살고 남은 잔재들이 그대로 심령장안에 공사판 자재들 찌꺼기처럼 널부러져 있다. 쓰래기들을 계속 치워내야 맑은 영상막이 유지된다.
사는게 항상 그럭저럭 한지라 행복한 꿈은 재료가 상당히 빈약하다. 반면, 방황하던 과거속 잡스런 영상 잔재들이 대부분 되새김질 하며 스쳐 지나가는데 그 사이 뜬금없는 끔찍한 꿈을 꾼다.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데 철판요리.. 검은 커다란 철판위에 짙은 양념에 버무린 바닷가재들이 줄줄이 올라온다. 마주앉은 상대가 집게로 고르게 한마리씩 펼쳐놓는데…
이것들 살아있다!!
양념이 눌어붙어 시커멓게 되자 긁게로 긁어내면서 미주앉은 상대는 입맛을 다시며 맛에 대한 찬양을 하고 가재들은 계속 익어가며 꿈틀댄다. 살아있는 낙지를 탕속에 넣고 투명한 뚜껑을 덮어 익어가는 장면을 즐기는 그것. 살아있는 생선의 살을 발라 숨쉬는것을 지켜보며 한점한점 집어먹고.. 때려 잡아야 제맛이라는 개고기등 미식을 핑계삼아 죽어가는 동물들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인간들의 야만성 들이다.
“어서 죽어 제발.. ”
나는 꿈속에서도 속으로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른다. 배경도 더럽고 어둡고 침침한 식당안에 인간이 사악한 악마이고 고통이 익어가는 꿈속의 그 장면은 지옥 그 자체다. 고추장 같은 짙은 소스양념과 함께 눌어붙는 고통앞에서 도저히 먹을수가 없기에 자리를 뜬다.
사는것이 지옥인가 죽는것이 지옥인가.. 지옥은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이며 가련한 생명체들에게 구원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꿈속에서 내내 어린시절 의문이던 철학적 문제에 다시금 빠져든다. 집게로 뒤적이고 뜨거운 철판에 양념과 함께 눌러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꿈틀대는 녀석들에겐 오로지 죽음만이 구원이자 축복이 된다. 최대의 자비는 빠르게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여름날 야외 바베큐 파티의 낭만과 내장들이 사라진 이후 술과 고기 먹는것을 즐기지 못하는 나의 현실적 갈등이 어린시절 동물들의 죽음을 보고 육식을 못했던것 처럼 삶과 죽음에대한 근본적 의문과 함께 그대로 버무러진 꿈이다. 어린시절의 품었던 의문에 대해 이제 지천명을 따라 답을 해야되는 나이가 된 것이다.
https://brunch.co.kr/@yemaya/49
*9년전인 2015년도에 기록해논 글이 있다. 브런치와 함께한 시간이 오래도 흘렀구나..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먹는다는 행위가 나에겐 항상 딜레마다. 사람들 만남도 크게 즐겁지가 않은것이 음식과 술자리를 함께 즐기지 못함 때문이다.
*옷을 입어도 어색하지 않은 몸무게 50kg 이나마 사수 하려면 먹긴 해야할것 같고 자식 먹이는것을 유일한 위안으로 여기는 어머니의 요구와 바램을 거부할수가 없다. (현재 174- 47 해골만 간신히 면한 몸매다.)
육식의 즐거움을 위해선 살생을 할수밖에 없고 생명들의 고통 또한 받아 들여야만 하는데.. 모두가 내로남불인지라 한쪽의 천국을 위해 수많은 생명들을 지옥속에 갈아 넣어야 한다. 약육강식의 룰속에선 죽음이란 결국은 돌고돌아 모두가 정기적으로 순환되야 함이다. 인간차례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자칭해도 하는꼴들 보라. 시골에서는 하루에도 수천마리의 벌레들을 잡아야만 생활이 되므로 죽음이 일상이다. 그렇다 해서 불나방들 처럼 스스로 죽음을 향해가는 생명들에게 일부러 고통까지 선사할 이유는 없다. 생존을 위한 행위와 고통을 주려는 행위는 같은것이 아니다.
지구적 상황을 보아하니 고대의 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함에 무엇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그저 지켜봄이다.
갑자기 영화 이야기.
픽션은 항상 대중의식의 트랜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영화는 현실을 기반으로 상상을 드러내는 예술 분야다. 일종의 꿈의 영상화다. 요즘 넷플릭스에 ‘삼체’ 라는 SF 드라마가 신작으로 올라와 있다. 중국작가의 소설원작인데 심오한 내용처럼 재미는 기대를 접고 무겁게 보게된다.
* 미주에서 1위하다 한국의 [기생수 더 그레이] 에 1위 자리를 넘겨주었다 한다.
대중들은 오락을 원하고 작가와 감독은 예술을 원하고 제작사는 돈을 원한다. 놀란 감독이 아니면 오펜하이머 같은 세시간 짜리 폭탄 만드는 물리학자들 이야기들을 누가 영화로 만들며 제작비를 대겠는가.(넷플릭스에 올라와서 나눠 보긴 하는데 며칠동안 아직 절반도 못봤다.)
삼체와 오펜하이머 둘다 영화적 재미는 그다지 못 느끼지만 소재에 대해 흥미는 땡겨서 끝까지는 보게된다. 삼체는 시즌2 나오기를 기대중이다. ( 외계인이 지구를 차지하러 오고 있는데 출발은 했고 도착하려면 4백년이 걸린다. 그 안에 지구인들은 열심히 과학을 그들처럼 발전시켜 맞대응할 준비를 해야하는 내용이다. )
별도로 돈까지 내고 본 ‘더 배트맨’ 도 마찬가지.. 슈퍼 히어로물이 아닌 오락성이 배제된 의도적인 그래픽 노블 원작 그대로 수사반장 분위기다. 버버리 코트 중절모 대신 편집증세에 사로잡혀 박쥐 코스프레 한채 (술담배 찌든 고독한 형사나 다름없는 정서 불안증을 가진) 평범한? 인간인 배트맨을 본다. (현실적으로 성인이 박쥐분장하고 돌아다니는게 정서불안이 아니라면 중2병 환자일것이다.)
아파도 안 아픈척 현실적 인간을 바탕으로 한 배트맨이란게 그런거다. 대중들이 원한건 당연히 슈퍼맨과 맞짱뜨는 저스티스 리그나 최소한 다크나이트인데.. 흥행이 될리가 없다. 그래도 난 돈내고 본다. 재미는 없어도 배트맨이니까. 귀찮은 몸 데리고 일부러 극장까지 갈 만큼 성의는 안 생겨도 방안에서 뒹굴대며 볼수있다. ( 시내 외출은 거의 없는데 고질라는 두시간 꼼짝않고 볼 각오로 극장갈 생각 하고 있다. 단, 상영관이 적고 하루한번 상영이라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종영 되기전에 결심을 해야한다.)
꿈들 역시도 재미는 없지만 보고 겪게되는 영상들이다. 의식의 정기적 청소가 시작되면 구석구석 남아있는 감정들의 잔재가 하나둘 재연된다. 가출해 말썽 부리던 고양이 녀석이 검은 강아지로 둔갑해 나타난다. 전날 새롭게 등장한 집냥이 출신 검댕이를 보아서 이다. (꼬리까지 수술로 잘린게 집에서 기르던 녀석이 분명한데 버림받거나 가출해 길양이가 된놈이다.)
젊은날 비지니스 관계에서 속고 속이던 카르텔이 현실과 맞물리며 복잡한 드라마들을 재연한다. 과거 기억들 다 사라진줄 알았지만 삶이란 시작을 알수없듯 끝이란것도 없는거다. 계속 새롭게 생성되고 펼쳐진다. 집안도 청소를 꾸준히 해야만 현상이 유지된다. 설겆이는 매일해도 매일같이 쌓일수 밖에 없다.
끔찍하고 찝집하고 어두운 꿈들이 보이는건 그런 요소들이 눈에 보이고 겪으며 쌓이고 있음이라.. 매일같이 묻은 때를 닦아내야 함에 도를 ‘닦는다’ 라고 표현한다. 신성한 꿈을 원한다면 마음도 생활도 청결해야 한다. 나는 끊임없이 생명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한다.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내내 귀찬이가 찾아오는 바람에 계속 밀어둔 (아직도) 대청소 (하려고만 생각하는) 중이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선 낡은것들 청소가 먼저다. 좋은꿈을 위해선 행복한 경험들이 필요하다. 뭐든 원 재료가 좋아야 좋은게 나오지 않겠나. 녀석에게도 나에게도.. 현실이 행복해야 잔재로 남는 꿈도 행복하다. 기억이란게 그러하다. 기회 있을때마다 행복의 낙인을 찍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