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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Nov 13. 2015

어린시절 지켜본 '죽음' 들과 '육식'

육식을 거부했던 유별났던 유년시절의 기억..


내가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 아마 2학년 (8살)때 였던것 같다. 학교가는 길에 찻길에 차에 치인 개(Dog)가 낑낑대며 숨만 헐떡이고 있는것을 보았다 .한적한 찻길에서 차들은 비켜가기만 하였고 주변 아무도 그 불쌍한 동물을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대로 놔두면 조만간 트럭등이 와서 한번 더 깔아뭉갤것이 확실해 보였다. 울컥하는 뜨거운 감정에 휘말려 나는 무작정 찻길로 뛰어들어가 피흘리는 개를 거의 끌다시피 안고 나왔는데 죽을것이 확실해 보였다.


낑낑대며 죽어가는 내몸 반만한 개를 안고 나는 학교로 가는대신 근처 개천가로 가서 눈물 흘리며 그 임종을 지켜보았다. 어린시절, 작은 곤충 동물이 아닌 인간과 비슷한 포유류 종에 대해 내가 지켜본 첫 '죽음' 에 대한 기억이다.그때 어린 내 머릿속은 슬프면서도 죽음이란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혼란 스러웠고 개가 느끼는 고통이 어떠한 걸까 의심하면서 나도 이 개처럼 죽을수도 있는걸까란 의문이 계속 들었다. 믿겨지지가 않는건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한참 울다가 개천가에 죽은개를 그냥 나뭇가지등으로 덮어주고는 집에 돌아왔는데  피묻은 옷을 입고 집에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는 깜짝놀랐다 .학교에서 안왔다고 연락와서 사고난줄 알고 내내 엄마가 여기저기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였고 학교를 빼먹은것에 대해선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또하나 기억나는 죽음은 내가 직접 사고로 죽게만든 삐야기(병아리) 인데 국민학교 5학년때다.


학교앞에서 팔던 이쁜 병아리들을 보고 무작정 한마리 사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신기해서 마냥 신나했다. 신해철의 '날아라 병아리' 란 노래는 그당시 대부분 아이들이 경험했던 이야기 인데 나의 삐야기도 그렇게 (신해철 병아리는 얄리 였다고 한다) 같은 코스로 커보지도 못한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너무 이뻐한 나머지 계속 지켜보다 낮잠이 든것인데 일어나보니 ... 납작이가 돼서 내옆에 죽어있었던 것이다. 작은 무덤을 만들어 십자가를 위에 나무로 만들어 꽂고 미안해 ... 잘가라는 기도를 했다.. 슬프다는 생각보다 미안하다란 죄책감이 더 컸다.



10살, 육식을 거부하다


결정적으로 어린 내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사건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였는데 엄마는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는 닭 도리탕을 해준다고 했다. 실제로 나 역시 그전까지는 별 무리없이 먹던 음식이었다. 장보는 엄마를 따라 시장엘 가게되었고 그땐 지금같은 대형마트가 국내 들어오기 이전이라 모든 장거리는 재래시장 이었는데 고기를 파는 정육점과 닭을 파는 '닭집' 이란 것이 있었다.


좁은 가게안에 살아있는 닭들을 철창속에 쫙 가둬두고 손님이 와서 닭을 주문하면 주인은 철창에 손을 넣어 닭을 잡아 끌고 나오게 되는데 손님들이 직접 '저놈 잡아주세요' 하고 닭을 지정하기도 한다.


가게 정면에는 검붉은 피가 물든 동구랗게 생긴 커다란 나무로 된 단두대겸 테이블이 있고 옆에는 뜨거운 김이나는 알루미늄 통이 있었으며 바닥에는 닭들이 흘린피가 좌악 깔려있었다.


철창안에서 동료들이 잡혀나가 해체되는 것들만 보던 닭들은 주인이 손을 집어넣으면 안잡히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좁은 철창안에서 닭이 달아날 공간은 없다. 끌려나온 닭은 바로 목에 칼을 맞게 되는데 그 즉시 죽는것이 아니라 눈만 꿈뻑 거리면서 소리를 내는것만 중지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살아있는 채로 그 정체모를 뜨거운 통안으로 거꾸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통은 뜨거운 열기와 회잔하는 원심력으로 닭털을 뽑기위한 도구였다. 목과 가슴사이에 칼을 꽂은 이유는 피를 뽑기위함 이었다 .그렇게 통에서 나온 닭은 순식간에 털이 뽑히고 그 피가 배인 동그란 도마에 올려져 몸이 조각조각 나게 된다.


어린 내가 보기에 그 장면은 난생 처음보는 살생의 끔찍함 이었는데, 나와 같은 살아있는 동물이 그런식으로 인간의 밥상에 올라야 한다는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엄마는 토막난 닭을 봉지에 받아들고 충격에 빠져 칭얼대는 나를 보고  '니가 안먹나 보자' 하며 웃으셧지만 나는 엄청난 충격에 우울함에 빠졌고 저녁때 온가족이 모두 맛있게 그 불쌍한 닭으로 만든 닭도리탕 을 먹는것을 보면서 밥상 옆에서 그냥 찡그리기만 하면서 안먹겠다고 항의하였다. 식구들은 "이 맛있는걸.." 하면서 나를 놀려댔고 나는 그냥 슬프고 화나고 그러다 가족들이 식사를 다 마친후 엄마가 밥먹으라고 독촉해서 마지못해 김치나 조금해서 식사를 한것같다.


목이 찔리면 아플텐데.. 나는 목을 찔린 닭이 눈만 멀뚱멀뚱 하던 장면이 계속 떠올라 내목이 찔리는 생각을 하며 도저히 감당안되는 끔찍함을 다른 동물들에게 서슴없이 하는 인간들의 야만성에 이성을 차릴수가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끔찍한 살육이 여기저기 벌어지고 있는 이곳이 내가 살아있는 곳이고 나역시 그렇게 죽을수도 있는건가.. 동물들이 죽을때의 고통을 나에게 대입시켜 보며 죽는다는건 무엇일까..아팟을텐데.. 내가 싫은만큼 그것을 당해야 하는 동물들의 심정도 똑같을거라는 생각에 어린내가 이해할수 없는 약육강식 룰의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기 시작한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고기 종류를 거부하게 됐고 식구들이 고기를 해먹는 날에는 유별떠는 내가 먹을거를 엄마는 따로 준비해야만 했다.죽기 싫어 발버둥치던 그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도저히 그것을 음식이라고 여길수가 없었고. 계속 나에겐 죽음과 관련된 고통이란 심각한 화두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다른 모든 생물체들도 나처럼 육체가 고통받는 존재일거 같은데..모든 생물체들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이런 현상은 도저히 이해불가한 상황이었다.


특히나 , 소나 돼지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물 하나를 죽여 나눠먹는게 아니라 통째로 국물을 우리는 생선매운탕, 닭등 조그만 동물들로 만든 요리들을 보는것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꼈다. ( 일부분 조금 먹는것은 죽은동물도 누가 자기를 먹었는지 찾기 힘들테지만 한마리를 통째로 먹는건 왠지 희생당한 동물의 원망이 먹는사람을 향할것 같은 생각을 했다.) 나는 고기로 만든 음식들에 대해 그 요리를 위해 들어가는 생명의 '숫자' 에 집착하였고 결정적으로 생명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만든 음식을 보았는데 그건 바로 '새우 젖갈' 이었다.



육식을 안하겠다 선언하고 식구들이 고기를 먹을때 나물 김치만 끄적이던 어린 나에게 김치마저 못먹게 만든 것은 김장을 담그는걸 내가 보면서이다. 하나의 살생도 아닌 수천마리가 동시에 죽어있던 김치에 들어가는 '새우젖' 을 보면서 그것이 김치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면서 나는 김치에 그런거 넣지말라고 소리질렀다. 내가 먹을게 아무것고 남지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 눈물까지 흘리며 안먹겠다고 우는 나를 보고 엄마는 내 김치를 따로 담궈주기로 했다. 조그만 항아리에 내가먹을 김치를 먼저 새우젖을 빼고 담고나서 식구들이 먹는 새우젖을 넣은 김치를 담기로 한것이다. 그렇게 집안에서 나는 내 전용김치를 따로 담궈 먹었고 다른집 김치는 내가 못먹는 음식 리스트에 올려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육식을 안하겠다고(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것 ) 결심한 이후 나는 생선살을 발라 먹는 '회' 라는 것에도 진저리를 쳤으며 청소년기까지 엄청 까다로운 편식하는 아이로 커야만 했다. 그러나, 꼭 고기요리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음식에 육식성이 안들어갈수는 없어서 엄마는 내가 맛있게 먹은것을 확인한 다음 다 먹고 난뒤에야 '그거 뭐 들어간건데 ' 라며 나를 놀렸고 나는 또 속았다며 화를 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못먹는 음식 리스트를 늘려갔고 반대로 엄마는 내가 먹을수 있는 음식 리스트를 늘리기 위해 매일 식사준비 하면서도 내 의사를 묻곤했다.


금기를 깨다.


내가 다시 육식을 하게된 계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접한 '술' 이란것을 배우면서 부터다.인간의 술안주 90% 이상은 고기 해산물 종류이다.


육식을 안하면 술자리 란것에 낄수가 없고 한국에서 사회생활은 불가하다. 술이란것은 나에게 체질적으로 너무 잘맞는 기호식품 이었다. 술을 먹게되니 모든 나를 억압했던  고민들이 떠나가면서 나도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겠다란 생각이 들었고 남들 다하는 그까짓 육식, 안주로 하나둘 집어먹어보니 그 맛이란건..처음 느껴본 회와 와사비 간장의 맛, 술한잔과 함께하는 삼겹살의 맛 , 그리고 결국은 아침에 쓰린속을 달래기 위해 내가 가장 끔찍해 했던 선지 해장국까지 ..모든 인간의 마음은 한번 금기의 틀을 허물어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된다. 술을 좋아하게 되면서 나는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속에 인기도 좋았고 매일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마시며 육식을 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물론, 지금까지도 먹는 육류는 몇가지 안되고 살부위가 아닌 다른 장기나 그런것으로 만든 (보통 혐오식품 이라는 말을 쓴다.)요리는 거의 먹지 않는다.고기만 먹어도 될걸 궂이 거부감 드는걸 먹을 이유는 없기 때문인데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음식에 대해선 안먹는것들이 많아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듣는다. 불편함이 없는이상 고쳐질거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음주와 육식을 즐기는만큼 (한국에서 이거 없으면 사회생활이 불가하다.) 주기적으로 몇년에 한번 몸이 정화를 위해 육식을 거부하는때가 있는데 먹으면 소화가 안되고 얼굴에 온통 반점들이 올라오면서 얼굴이 점박이가 된다. 몸안에 쌓인 술과 육식의 독성들이 빠지는 기간동안은 다시 육식을 자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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