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 아닌 다른 인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아마도 30중반 이후 부터이다. 태어날때부터 성장하기까지 그리 평탄치 않은 남들과는 다른 이방인 취급을 당하며 자란탓 때문에 타인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것 같기도 한데, 어쨋든, 어린 시절의 나는 60~70년대 한국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불가한 괴상한 아이로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지냈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뱃속에 가졌을 당시가 인생에 있어 시댁살림으로 인한 가장 정신적으로 힘든 노이로제 정신병 일보직전의 시기였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마자 영양실조인 황달증세를 보였고 일반 아이들과는 확연히 작은체구의 기아 모양에 뇌막염에 홍역까지 동시에 앓았다.
의사들은 전부 내가 얼마 살지 못할거라고 이구동성 주장해 우리엄마를 슬프게 하였는데 어쨋든 60년대 한국의료 수준으로 뇌막염 수술은 거의 성공확률 희박한 수술이었나 보다 ."이 아이는 죽는다"가 암묵적 의사들의 대세의견 이었다고 한다.
보통 인간들은 자신의 갓난아기 시절을 기억 못하는게 일반적인데 나는 특이하게도 갓난아기때 받았던 그 끔찍한 시술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척추에 주사를 맞는것이 갓난아이에겐 거대한 쇠파이프를 등에다 꽂는것과 다름없었고 나는 굵은 쇠파이프가 내 등을 꿰뚫고 뼈에꽂혀 내는 '우두득'거리는 소리를 기억한다. 생존 본능으로 살기위해 온몸이 불덩이 같이 뜨거운 열을 내는 아기를 무식한 의사들은 수시로 식혀야 한다며 차디찬 알루미늄 침대에 눞히고 온갖 약물 실험들을 해댔는데 어쨋든 의사들이 곧 죽을거라던 아이는 이런 지옥같은 모르모트 상태로 6세까지 온갖 독한 약물을 몸에 투입하며 병원에서 시간을 집보다 더많이 보냈다.
어린 나는 병원에 가느니 죽겠다고 선언하고 병원가기를 온몸으로 절규(그야말로 울다가 기절할 정도로) 하며 거부 하였다. 거의 매일같이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지르며 울다 기절하는 날들 이었는데 그것은 살기위한 나 본능이 행한 행동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병원에서 투입하는 약물들을 계속 맞다간 결국 모르모트로 죽는다는걸 직감으로 알았던 것일까..결국, 부모님도 병원 치료를 포기했다.
생존에 대한 본능은 경이롭다.
어린 시절의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살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것 같다 .의사들이 아무리 겁주고 엄마는 나를 보고 울고 했지만 나 스스로는 죽음이란것을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거 같고 끔찍하게 하기싫은 치료와 주사는 나에게 희귀한 바나나 (당시는 엄청 비싼과일로 맛보기도 쉽지않았다.)나 아이스크림등 고통을 참는 댓가로 얻게되는 순간의 달콤함을 얻는 행위로만 인식했다.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쓸데없는 두려움이 없다.)
극적인 변화는 7세때 부터 시작됐는데 나는 병원을 끊으면서 내몸이 아프다는 것을 점점 생각치 않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어떻게 됐냐 한다면, 그때부터 나는 세포들의 자연 치유력에 의해 모든 의사들의 말이 뻥이었음을 증명하며 누구보다도 건강한 체질로 초등학교 입학한 7세부터 여태까지 40년이 넘는 기간동안 잔병치례는 물론 병원에 입원한 기억이 전혀 없다.
어린아이의 세포 재생은 신체를 완전히 다른 신체로 바꿀수있을만큼 놀라운 빠른 순환주기를 가진다. 지금의 나를 보면 내가 어린시절 그런 기아형태에 뇌막염 수술받고 소아마비 증세까지 보였던 곧 죽을 아이였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물론,약물에 쩔었던 세포들도 모조리 빠져나가 흔적조차 없기에 지금의 내 육체를 구성하는 새로운 세포들과는 전혀 연관없다. (교체되지 않는 세포는 뇌 안의 신경세포와 심장,근육 세포등 몇가지 특수세포들 뿐이다.보통 과학자들은 안간의 세포를 60조 갯수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세포는 매일같이 바뀌고 있으며 4개월 정도면 대부분이 교체된다고 한다.)
어린시절 병원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초등학교때도 예방주사도 못맞고 벌벌 떨었고 지금까지 병원이라면 몸서리 치면서 거의 담을 쌓고 살았는데 어린시절 생사를 여러번 함께한 나의 세포들과 나의 믿음에 대한 관계는 그렇게 형성됐고 내몸을 가장 잘 아는것은 나 자신이라는 믿음은 나에겐 절대적이다.
나는 대략 7년 주기로 내 세포들이 새롭게 교체되는 주기를 알고 있기에 지식으로 진단하는 병원 의사말보다는 내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무조건 나자신을 믿으며 여태껏 큰탈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다.
갓난아기때 뇌수술을 받으며 "만약 , 이 아이가 살아남는다면 바보 아니면 천재" 가 될거라고 의사는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바보는 되지 않았지만 나는 살아남은 이후, 이해하기 힘든 인간들의 룰을 습득하고 맞추느라 계속 주변과 부딫치며 지내야만 했다.
왼손쓰기만을 고집해 초등학교 내내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나혼자 맨앞자리에 불려가 오른손으로 이름쓰기를 하루종일 강요 당하기도 했고 왼손을 쓸때마다 손바닥을 맞기도 했으며 멀쩡한 왼팔을 쓰지말라고 붕대로 감고 다닌적도 있다. .(70년대 한국사회는 그랬다. 남들과 다른것은 인정하지 못하는 박정희식 군대 사회였다) 학년 올라갈때마다 담임은 기필코 내 못된버릇을 고치겠노라 우리 부모님께 장담하였으나 학교를 가지않겠다고 버티는 어린아이의 고집을 당할수는 없었고 결국은, 어느 어른도 내가 하고자 하는것을 막진 못했다.
그외에도 채식만 고집하고 온갖 유별난짓만 골라해 학교는 물론 집안에서도 나를 '괴물'이라고 불렀는데 어린시절의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속에서 살던 아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의 나는 그림 ,음악 ,글짓기 ,공부 체육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같은 또래 애들보다 월등한 재능을 보여 모든 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 상을 모조리 쓸어오곤 했다.
어쨋든, 어린시절부터 나는 다른사람들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여태껏 살아왔는데 지금은 한국도 왼손잡이나 독창적인 생각들을 개성이라 여기고 더 개발하려는 추세지만 적어도 70년대 나의 어린시절은 그렇지 못했다. 차별대우 받고 이상하다고 수근대는 획일화된 사회여서 나는 집단에 동화되기위해 계속 나를 다른 사람과 맞춰가며 나름대로 노력할수밖에 없었다. 중고등 시절 사춘기때는 극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20대는 국내선 미술을 전공하다 중간에 음악으로 전공을 바꿔 유럽으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고 (미대 다니다 콘서바토리움 음대로 전공을 옮긴 흔치않은 케이스이다.)30대는 사업을 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인간계층 사회를 접하면서 그들과 동화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던것 같다. 다행히 뭘하던 별다른 노력 없이도 기본은 한거 같은데 정작 중요한 삶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항상 나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처럼 남들이 다 아는 (내가 생각한것과는 다른 ) 양심이나 그런 교과서 적인 상식이 아닌 사회적 기본상식(?)을 모르는 철없는 어른이어서 나는 계속 다른 사람들이 가르키는 '삶' 이라는것을 "왜 인간은 ? " 이라는 질문을 입에 달면서 필사적으로 따라할수 밖에없었다.
결과 , 나는 왜 인간들이 내가 생각한것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수 있게 되었고 내가 원래 타고날때부터 자연스례 알고있던 상식이 결론적으로는 옳은것 이었음을 스스로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 단지 ,삶이란 검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회가 집단과 다른 생각으로 괴물취급 당하는 젊은이들을 수용할수 있는 형태로 점차 변모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 역시 이제 내가 아는 인간 이야기를 한다.
*이 글은 내가 암에 걸리기 이전 2015년도에 남긴 글이다. 이후 나 스스로 암에 걸려 내장들을 다 도려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은 이 기록을 남겼을때와 많이 달라졌다. 중년이 돼고 죽음을 한번 더 넘어와서 다시 복구하는 과정중인데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자가회복 시스템을 다시 작동시키고 있는중이다.. 인체는 정말 신비로운 영혼의 도구임을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