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베이 40주년 기념 서울콘서트 후기.
등장할때 불세출의 영웅이었고 전세계 락 매니아들의우상이었으며 지금은 락 역사의 전설이 되어버린 잉베이, 솔로 데뷔 40년 거의 퇴물(?)이 되고서야 직접 실체를 보게되다.
80년대 잉베이가 혜성처럼 등장해 전세계 락 음악씬을 휩쓸때 한국은 군사정권의 연장선에서 문화쇄국 정책으로 (퀸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도 금지곡 이었다.) 락 불모지 였던지라 잉베이도 일본은 뻔질나게 다니면서도 한국이란 나라는 아예 인식에 없었을거다. (당시는 유럽인들 한국이란 나라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락을 해적판으로 듣던 아웃사이더 십대들도 다 늙어서 락 콘서트인데 관중들 거의가 50대 아줌마 아저씨 들이다. (나 어릴때 살던 옆동네 ) 서울 변두리 학교 체육관 빌려서 평일날 밤 1회 공연에 절반정도 찼다. (잉베이가 전성기때 한국이 지금과 같았음 올림픽 경기장에서 주말 4회 공연 펼쳐도 꽉찼을거다.)
* 아래는 개인 감상평일뿐 사실과 다를수 있으며 다들 제각기 다른 감정을 느꼈을것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냐 소감을 묻는다면 사운드 엔지니어를 동반하지 않았던지 (인원 감축으로 보컬도 빠져서 잉위가 몇곡조 뽑고 건반 주자가 노래도 부른다.) 기타 소리만 따로놀면서 스탭들 Non Professional 밴드 사운드 발란스가 끔찍했다 라는 정도 언급 하겠다. 아무리 퇴물이라 해도 세계적 아티스트 인데 변두리 합주실 사운드 듣는듯.. (파비온더는 건반이랑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 건반은 뭔가 연주는 하는데 객석에선 볼륨이 아예 들리지가 않는다. 가장 중앙에 좋은 자리임에도 모든 반주 사운드가 뭉개져서 기타 소리만 동떨어진 솔로로 크게 들린다.)
잉위의 까탈스러움은 유명한데 한곡 연주할때마다 새로 세팅된 다른 기타로 바꾼다. (연주곡수 만큼 기타가 바뀐다.) “Give me the Nice Guitar!” 세팅이 제대로 안돼 바꾼 기타가 두번이나 뻑나서 맥이 끊기니 (내 생각엔) 짜증을 낸다. (기타 세팅도 프로연주자 급의 전문가가 해야한다.) 퍼포먼스에서 기타에 노이즈 이펙터를 걸고 그냥 퇴장 해버리는것으로 항의(?)를 해서 스탭들이 무대로 뛰어들어 파워를 끄고 소리를 멈춰야 했다. (원래 맥을 끊고 가는 그런 행동을 다른 공연에서도 자주 하는지라 돌발 행동이 아닌 원래 의도한 연출일수도 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보다 검정밴이 먼저 공연장을 빠져 나가는데 (아마도) 까탈 부리는 잉베이가 탔을거다.(?) (뒤풀이 보단 좁은길에 차 막히기전 출연진부터 배려한 의도 였을거라 본다.)
빠른 속주에서도 쿠세로 뭉개고 틀린음 하나하나 다 잡아내고 들리는 나처럼 까탈스럽고 예민한 음악전공이 아닌 일반 관중들에겐 좋은 추억꺼리로 남길 바라며.. 뭘해도 잉베이 인데.
19세때 솔로로 데뷔하면서 내세운 ‘Far Beyond the Sun‘ 이 40년을 맞았다. 특히나 내 어린시절과 청춘을 보내면서 잉베이를 알게되고 우상으로 보냈던 나 살던 변두리 마을에 잉베이가 직접 찾아와 공연을 했다는것에서 개인적으로 더 감회가 남다르다.
“40년후에 잉베이가 이 마을로 찾아와 직접 ‘Far beyond the sun’ 을 연주할거야” 당시 누군가 그런 예언을 했다면 과연 믿었을까..가능성 제로의 허무맹랑한 말이라 무시 했을거다..
잉베이도 늙었고 나도 늙었고 같이 늙어 파비욘드썬을 40년 지나 내가 살던 변두리 동네 찾아와 연주하고 듣는것 상상조차 못했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변모된 옛 동네를 둘러보며 어느새 40년이 흘렀구나.. (아리랑 재래시장 자리에 지하철역이 생겼다.) 40년이 순식간이라 생각이 나이를 따라가기 벅차다. 천천히좀 가자. 옛 생각들이 뭉태기로 떠오른다.
* 확실히 현재 내 컨디션으로 락 콘서트 스탠딩은 무리다. 개인적으로는 음악 취향도 재즈와 클래식을 선호 하는지라 열광대신 잠시 잉베이를 선망하던 고교시절의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노심파괴 하는 잉베이의 변모된 모습에서 인생이란것 한 사람과 한 시대가 저문다는것을 실감한다.
바로크메탈이란 새로운 장르로 락의 방향 궤도를 자신쪽으로 바꾼 기타영웅. 메탈리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잉베이 클래식 락의 대세가 좀더 오래 갔을거다. (당시는 전세계 락 기타리스트 들이 잉베이 따라하기 속주 경쟁을 벌렸었다.)
잉베이는 등장할때 온갖 찬사를 받았지만 메탈리카는 음악이 아닌 ‘트래쉬(Trash 쓰래기)‘ 라는 평론가들의 혹평을 들었다. 그러나 대세는 메탈리카로 방향을 틀고 혹평으로 쓰인 ‘트래쉬‘ 메탈 이라는 신장르가 새로 탄생되며 락의 메인스트림이 된다. 기존 질서를 파괴한다는 락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잉베이가 내세운 복잡한 바로크 기교에 고음과 속주대신 탱크처럼 밀어버리는 단순한 반복 리프에 저음으로 호통치는 메탈리카가 락 역사의 흐름을 끌어갔고 메탈리카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티스트를 외모로 평가해선 안되지만 잉베이의 데뷔시절 귀족적 꽃미남 스타일이 중년이 되감에 비만에 약물중독에 점점 망가진 외모로 충격을 주더니 오늘 실물을 보니 살뺀건 좋은데 갑자기 울버린이 웬일이냐 구렛나루 보고 감작 놀랐다.
열정이란게 젊음의 특징이다. 락은 특히나 광기와 열정이 필수다. (60년대 탄생한 락 자체가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청춘과 젊음을 지지기반으로 삼았던 장르라 다들 40되면 물러나고 은퇴 해야 하는건줄 알았다.) 대부분 음악 천재들 보면 십대 후반에 두각을 보이고 20초반에 정상에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찌기 젊어서 명예 영광 부와 하고 싶었던 모든것을 다 이룬인물, 잉베이는 지금 행복할까. 아니면 (화려했던 과거에 비하면 ) 퇴물취급 당하는것에서 불만일까.. 잉베이 맘이겠지. 다 가져봤고 더 가질것도 없고 늙어는 가니까..
https://youtu.be/WdAqnc-AjoQ?si=ca-OakbIWHIxCTIh
https://youtu.be/_W7wqQwa-TU?si=yYCKYXhRBhzATyh
*국가에서 법으로 적대국인 미국의 퇴폐 자본주의 문화라며 락음악을 금지했던 소련이 메탈리카의 공연을 허가하자 해적판으로 몰래 메탈리카를 듣던 소련의 젊은이들이 모스크바로 몰려 들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월‘ 공연은 동서독 통일을 기념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고 메탈리카의 모스크바 공연은 최초의 미국밴드 소련 상륙으로 소련붕괴를 상징하는 역사적 공연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