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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민아씨 Nov 24. 2024

갑이지만 을입니다.

돈 내는데 눈치 보는 아이러니한 갑을관계.

직장 생활에서 에이전시들과 일할 일이 많았는데, 계약서의 '갑'사 종사자로 업체를 컨택하고 일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리스트업 되어 수년째 일하는 경우도 있고, 새로운 업체에 컨택하더라도 이름 있는 기업에서 연락하니 대부분 호의적이었지요. 브랜드가 광고비를 쏟아부으며 이름을 알리는 건 바로 이런 '이름'을 안다는 것이 상대에게 '신뢰'를 주기 때문임을 B2B에서도 체감할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 누구도 알지 못하는 듣보잡의 브랜드로 적은 초도물량을 발주하려고 하니, 컨택 전부터 눈치를 보게 됩니다. 우선, 제작 과정에 대해 지식이 부족하니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도매시장을 돌아다니며 물어보는 등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원부자재 도매처의 눈치가 보이고요. 어느 정도 만드는 데 필요한 게 뭔지 알겠다 싶어 제조 공장에 컨택하면 최소주문수량인 MOQ에 미치지 못해 생산이 안 된다는 말을 듣기 일쑤입니다. 어쩌다 MOQ가 낮은 업체를 찾아 얘기를 나눠보면, 기획된 자체 제작 제품이다 보니 주문제작을 해야 하고 물량이 적으니 단가가 높아 원가부터 가격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초반부터 아직 시장성이 검증되지 않은 제품에 돈을 쏟아부어 대량으로 만드는 재고부담까지도 이어지기 때문에 초기 사업 단계에서는 막대한 리스크를 피하려 아이템을 포기하게 되지요.

이렇게 연락이라도 돼서 된다 안 된다 말이라도 들으면 다행입니다. 공장, 제조업체를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데, 어렵게 찾아낸 곳에 문의를 남겨도 회신 주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카톡으로 문의를 받는 A라는 업체에는 제조 의뢰 메일을 남긴 후 카톡으로 '메일 수신되었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라고 남긴 적도 있어요. '잘 받았습니다. 지금 업무가 밀려 확인 후에 회신드리겠습니다'라고 해놓고는 두 달 넘게 (아직도) 답장이 없습니다.

제작이 가능한 곳을 어렵사리 찾아내어 일을 진행한다 해도, 대기업에서 했던 것처럼 계약서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서로 법무팀 검토를 받아가며 문서화하기는커녕, 최소한의 계약 문서를 남기고자 해도 돈을 내는 (계약서 상) '갑'인 제가 다 챙겨야 하고 '을'에서 껄끄러워하지 않을지 눈치를 봐야 합니다. 안 해준다 그럼 어떡해요. 해준다는 곳 찾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ㅠㅠ.. 이메일로 연락해도 안 보는 사장님들이 많고, 문자나 카톡으로만 소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무리 제가 서류를 이메일이나 문자로 보내도 출력해서 달라고 하고 사전에 보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이메일이 소통의 기본이던 회사생활에서 문자나 카톡으로 중요한 얘기들을 하려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본계약은 무조건 샘플을 받고 나서 합니다. 샘플비용이 비싸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분명 'A를 만들 거예요. 가능하실까요?'라고 하면 '가능해요'라고 했던 업체에 샘플을 제작했는데 'B'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커뮤니케이션은 원활한지 꼼꼼하게 챙겨가며 일하고 있는지, 납품을 제대로 할 업체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요. 좋은 업체를 찾아내고, 이런 업체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며 일을 한다는 건 이제 막 시작한 브랜드한테는 가장 어려운 숙제인 것 같아요.

어서 자리를 잡고 제작 수량이 많아져서, 눈치 좀 그만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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