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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Dec 25. 2019

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1.

어김없이 눈 뜨자마자 켠 라디오. DJ들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사연과 위로가 반복된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솔로라 집에서 맥주에 영화나 봐야겠다는 한숨 섞인 사연에, 크리스마스이브가 별거냐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가만히 듣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로’ 따위 안 건네지 않나?

한때는 그랬다. 특별해야만 할 것 같은 날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면 진 것 같은 기분. 알 수도 없는 누군가에, 뭔지도 모르는 무언가에 그런 피해의식을 가졌다. 되돌아보니 공허한 투쟁임을 알면서도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해가 더 많았다. 


2016년부터 상황이 변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우리만의 기념일이 됐다. 그해부터 필사적인 노력도 괜한 긴장감도 느낄 필요가 없게 됐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의 기념일이 찾아왔지만 한국과 덴마크에 서로 떨어져 있어 이 날을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됐다.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버릇처럼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서로 바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맞는 날이 크리스마스이브밖에 없었다. 잘 됐다며 그날 만나기로 했고 날짜를 정한 뒤부터 그 긴장감은 사라졌다.


예약 도서가 도착했다는 반가운 알람이 왔다. 평소와 같이 약속 시간 전 도서관에 들러 예약 도서를 받고 신착도서 서가로 향했다. 책방에서 눈여겨봤던 책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책을 한 아름 빌려 친구를 만나 맛있는 걸 먹고 또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밀린 수다를 떨었다. 평소와 같이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내가 원하는 것들로 채운 일상 그 자체였다. 애초에 필사적인 노력도 묘한 긴장감도 필요 없는 날이었을지 모르겠다. 내일은 오랜만에 책방에 가는 날이다. 부디 공허한 투쟁에 자발적 노예가 되지 않기를. 조금 더 보고 싶어 하는 것에 그치기를.




2.
회복 기간을 마치고 2주 만에 출근했다. 손님이 엄청나게 많거나 엄청나게 없을 것이라는 복불복 시나리오를 그리며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출근했는데 딱 중간이었다. 없을 때는 없고 몰릴 때는 또 몰렸다. 오픈하고 몇 시간 동안은 손님도 없고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나 아픈 거 알고 봐주는 건가 싶던 찰나 손님이 우르르 몰려왔다. 책 정리를 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정확히 다섯 쌍의 커플이 있었다. 흡사 이 시간에 맞춰 커플 이벤트에 참여하러 몰려든 것 같았다. 여자친구 가방을 들고 있는 커플, 책에 흠뻑 빠진 커플, 여자친구만 졸졸 따라다니는 커플, 들어오자마자 꽉 찬 매장에 놀라 바로 나가는 커플 등.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너무 웃겨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 많던 커플이 차례차례 자리를 뜨자 가족 손님이 등장했다. 보기에 딸 부부와 아버지가 같이 온 듯했다. 딸이 생일책을 사달라고 조르자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내미셨다. 포장비 2천 원이 추가된다고 했더니 무섭게(느껴지는 얼굴로) 쳐다보셨다. 계산을 하는 동안 딸에게 "그래, 이 책도 하나님이 발걸음을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만나게 된 거니까" 하셨다. 사위로 보이는 남자가 “증정식 인증샷 한번 남기셔야죠” 하더니 둘을 세워놓고 찰칵찰칵 몇 번 하고는 사라졌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임을 실감했다.

한가해진 틈을 타 화장실에 다녀왔다. 총총 뛰어왔는데 벤치에 작은 백구가 묶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니 남자 손님 한 명이 책을 보고 있었다. 강아지는 그 남자 손님만 보고 있었다. 데리고 들어와도 된다고 말해주려 했는데 "감사합니다" 하시고는 백구와 사라졌다. 그 모습에 괜히 마음이 따뜻해져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에 한 출근이라 새로 들어온 책을 구경했다. 평소에 읽고 싶던 소설이 아직 남아 있어 책을 펼쳤는데 한 줄짜리 문장에 엄청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듯 마음이 벅찼다. 크리스마스에 일하면 배 아플 줄 알았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그 표정을 관찰하고 있자니 덩달아 행복해진 듯하다. 평소와 다를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걱정했던 내 모습이 웃겨 또 피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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