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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Feb 22. 2020

01 개코원숭이 카페에서 생긴 일

21/2/2020 at Baboon Coffee

덴마크에 온 지 오늘로 딱 이주다. 오래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살인적인 물가'를 체감한 건 처음 버스를 탈 때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시내까지는 약 4km. 마음을 잘 먹으면 걸어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전거나 버스를 탄다. 교통카드는 이것저것 필요한 절차를 거쳐야만 만들 수 있다. 교통 카드를 발급받기 전까진 버스 앱(Fynbus)에서 승차권 구매 후 이용할 수 있는데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금액이 책정된다. 앱에 등록한 카드로 결제하면 한 시간 내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이 생성된다. 버스 탈 때 화면을 보여주면 운전기사가 Yep! 하고 웃어준다.


처음 탔을 때. 하차벨과 화면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착석


집에서 시내까지는 편도로 약 4천 원. (교통카드가 있으면 절반이다)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시간 때우러 시내에 나간다고 치면 교통비만 최소 8천 원이다. 오전에 집을 나서 한 끼를 때우고 카페를 간다고 하면 최소 3만 원 이상이 든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4-5시 전, 정확히 말하면  직장인들이 모두 퇴근해 휘게하러 집에 들어가 거리가 썰렁해지는 시간 전에 집에 들어오는 게 좋기 때문에 오전 10시 전에 집을 나서는 편이다. 개코원숭이 카페도 9시에 문을 열어 5시 반이면 닫는다. 한국에서처럼 주 2회 이상 이렇게 생활하다간 파산되는 건 일도 아니기에 일찍이 포기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랜만에 하늘이 하늘색으로 보였다. 비도 안 왔고 해도 쨍쨍했다. 오늘이다 싶어 바로 세수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시작부터 순조로웠다. 신호등은 물론 횡단보도도 없어 당황했던, 차선 옆에 깔린 자전거 도로로 인해 2차선이 4차선으로 보이는 데다 무단횡단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내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어 울기 직전이었던, 정류장에 몰아치는 비바람을 15분 이상 견뎌야 했던 지난날과 달랐다.


개코원숭이 카페 가는 길에 찍은 오늘 하늘


버스 도착 예정시간 10분 전에 집에서 나왔다. 지도 없이도 신호등을 찾아 건넜다. 마치 현지인처럼. 정류장에 도착해 4분 정도 기다리니 91번 버스가 왔다. 외계어 같은 안내 음성이 들릴 때마다 토끼 눈을 하고 정류장 이름과 구글 지도를 번갈아 확인하던 지난날과 또 달리, 인스타그램도 확인하고 창밖 풍경도 감상했다. 내릴 정류장 이름이 들리자 여유롭게 스탑 버튼을 누르고 내렸다. 한번 해봤다고 이렇게 여유로워질 수 있나. 역시 뭐든 해보는 게 중요하다. 해본 걸 자양분으로 삼아 다른 상황에 적용하는 건 더 중요하고.


시내에 도착해 주민센터로 갔다. 번호표를 뽑자마자 내 차례가 왔다. (창구라고 하기엔 가지각색 테이블에 누구는 서서 일하고 누구는 앉아서 일하고 누구는 걸터앉아서 일하는, 자유분방 끝판왕 스타트업 사무실 같은) 창구로 가니 반팔티 차림의 할아버지가 맞이해줬다. 역시나 지난날과 달리, 요구사항을 정확히 말했다. 할아버지 직원도 여권을 집어던지듯 건네던 할머니 직원과 달리 친절했다. 주민센터를 방문한 목적인 NemID(공인인증서)도 5분 만에 발급받았다.


어제 찾아본 카페로 가기 위해 지도를 켰다. 주민센터에서 카페까지는 걸어서 15분이 걸렸다. 저번엔 주민센터에서 용건만 보고 바로 집에 갔는데 오늘은 새로운 길도 걸어보고 하니 진짜 덴마크에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도 많이 극복했는지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길을 걷는데 영화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문제는 카페에서였다. 구글맵에 얼음이 들어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페라는 한글 리뷰가 있었다. 콜드브루를 먹었다고 해 메뉴판에 있는 Coldbrew와 가장 비슷한 덴마크어를 찾아 콜드브루를 주문했는데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몸집, 수염, 중저음 그 이상의 낮은 목소리를 가진 사장님이 못 알아들어 바로 쫄았다. 저스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킬 수 있냐고 물으니 Sure! 이라고 했다.


결제를 하려고 비자 카드를 내밀었는데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아저씨가 결제가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카드나 모바일 페이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평소와 다르게 바리바리 싸들고 나오지 않고 여권과 카드만 딱 들고 나왔는데. 이때부터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 카드 외에는 없다고 하니 그냥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Never mind! 를 외치며 나를 안심시켰지만 이미 쫄은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노노노! 를 외치며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이미 커피 제조에 들어갔다. 맺힌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의 나라에서 공짜로 커피를 얻어 마시는 한국인이 될 순 없었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영어를 지껄이다 안 되겠다 싶어 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혹시 몰라 챙겨 온 지갑이 있었고 거기에 마스터카드 하나가 들어있었다. I found another card!!! 를 외치며 카운터로 갔고 성공적으로 결제했다. 화장실에서 정수리에 가득한 땀을 닦고 나오니 내 자리에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사장님이 만들어주신 뜨거운 아메리카노


비록 원하던 커피는 얻지 못했지만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커피도 알맞게 식었다. 산미가 조금 있었지만 진하고 맛있었다. 이 정도면 나름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집에 와서 바로 영어공부를 했다. 이날을 떠올리며 보다 더 여유롭게 미소 지을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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