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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Aug 15. 2021

스무 살처럼 살고 있는 서른의 기록


글 쓰는 걸 꽤나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올해가 4개월 조금 넘게 남은 시점에서 다시 글을 쓴다. 그간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장에 조금씩 끄적이긴 했는데, 이렇게 앉아 글 쓸 시간은 만들지 못했다. (역시나 핑계)


덴마크에 다시 돌아온 지 3개월 반이 됐다. 그리고 3개월 반 동안 참 많은 성취를 이뤘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이 생각해도 그럴 성과들. 먼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아직 계좌도 없고 첫 월급도 받지 못했지만 돈을 버는 일을 구해서 하고 있다. 곧 인턴십도 시작한다. 돈을 버는 일은 아니지만 덴마크 회사에서 경력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8월부터는 긴 여름방학 끝에 덴마크어를 배우는 어학원도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돈은 스시 뷔페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벌고 있다. 덴마크가 재개방되던 시점인 6월부터, 보이는 곳마다 파트타임용 이력서를 넣었다. 작년에는 연락받은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꽤 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고 트라이얼도 했다. 처음 인터뷰를 보던 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고, 처음 트라이얼 간 날엔 손이 달달 떨렸다. 트라이얼의 목적은 이 일이 서로에게 맞는지 알아보기 위함인데 판단은커녕 쏟아지는 영어 홍수 속에서 정신 차리기 바빴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하듯, 한 두 번 하다 보니 긴장은커녕 또 트라이얼 오라니까 가보고, 여긴 아닌 것 같으면 중간에 나오고, 궁금한 건 정확히 물어보고 하는 수준이 됐다.


그러던 중 현재 일하고 있는 레스토랑에서 연락을 받았다. 가장 바쁜 금요일에 트라이얼을 한 덕(?)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특히 스무 살 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4개월인가 5개월 정도 일했던 경험이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큰 힘이 됐다. 잊고 있던 10년 전의 기억이, 나도 모르게 손에 익었던 것들이 일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덴마크인과 중국인이 공존하는 낯선 환경에서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미니스커트에 머리띠하고 열심히 파스타와 스테이크 그릇을 치우던 스무 살 쎄쎄에게 감사를.


어학원은 원래 시내에 있는 학원으로 다녔다. 일주일에 세 번,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수업하는. 새벽 기상은 물론, 점심도 싸가야 했고 집에 오면 기절하기 일쑤였다. 작년에는 이 스케줄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혹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학원마저 열심히 다니지 않았다면 무의미한 시간에 짓눌려 우울감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도 당연한 수순으로 비자가 나오자마자 어학원을 등록했다. 작년과 달리 중간에 합류해 친구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았고 작년과는 다른 수업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같이 사는 사람의 일터이자, 집에서 자전거 타고 10초 거리인 대학교에서도 덴마크어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됐고 망설임 없이 학원을 옮겼다. 솔직히 말하면 이 어학원에 다니기 싫어서 저 어학원으로 옮긴 거였다. 적응을 하지 못하니 괜히 버스비도 아깝게 느껴지고, 새벽 기상도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해낸 핑계가 '곧 일도 구할 텐데 어학원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지'였다. 지금은 계획한 대로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인턴십은 같이 사는 사람의 동료의 여자 친구분이 공고를 공유해준 덕에 지원했다. 그 전에도 파트타이머 지원을 하면서 동시에 회사용 이력서로 몇몇 회사에 지원하기도 했었다. 당연히 연락을 받지 못했고, 딱히 관심 있는 회사도 없었다. 이번에 지원한 회사는 덴마크 회사로, 올해 한국 시장에 본격 진출한 회사다. 직무와 산업 모두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여서 어렵지 않게 motivation letter와 이력서를 다듬어 지원했다. 손발이 차가워질 정도로 긴장한 1시간가량의 영어 인터뷰를 마치고 합격 소식을 들었다. '무급 인턴'이라는 개념을 잊고 산 지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주임급 경력인데 그래도 돈은 받고 일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지만 얻고자 하는 게 확실했기에 잡생각은 금방 떨쳐버릴 수 있었다.




얻고자 하는 게 꽤 명확하다. 스시 레스토랑은, 돈은 물론이고 실전 레스토랑 영어와 덴마크어 연습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더군다나 집에서 4km 이내에 있어 자전거로 출퇴근이 가능해 교통비를 아낄 수 있고 더불어 자전거 연습도 할 수 있다. 이미 몇 번의 출퇴근을 하며 자전거 힐링의 맛을 봤다. 무급임에도 인턴십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영어다. 보수적인 한국 기업에서만 일하다가 어쩌다 보니 재택 기반의 덴마크 회사로 급 건너뛰게 됐다. 덴마크 회사이지만 모두가 영어로 소통하고 재택 기반이기에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영어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또 좌절할 내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그만큼 얻는 게 많다는 걸 안다. 또, 이커머스 마케팅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석사 진학을 꿈꾸고 있는 UX/UI 관련 공부도 눈꼽만큼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끔 잠이 안 올 때면 같이 사는 사람과 침대에 누워 어쩌다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는 건지, 처음 여기 올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등의 얘기를 나눈다. 내 선택의 중심에는 행복과 성취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행복하려면 이 길을 선택해야 하고, 내가 느끼는 행복 중 가장 큰 부분은 성취감이 차지하고 있다. 남이 만들어주거나, 남을 따라 만든 목표가 아닌 내가 만들어 가는 목표. 살면서 영어는 꼭 잘해보고 싶다는 목표. 하루라도 젊을 때 보다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목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면서 살고 싶다는 목표. 인생을 즐기는 게 어떤 건지 알아가고 싶다는 목표. 이러한 목표가 있는 나 자체로도 행복한 사람인 걸 잊지 않으며, 달콤한 성취의 맛을 잔뜩 느끼며 서른을 잘 마무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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