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을 얻고 타인을 잃었습니다
'모터가 과열될 수 있으니 하루 3회만 틀 것'
탕이 두 개뿐인 작은 공중 욕실 안 따뜻한 욕탕의 벽 상단부에는 대충 그런 내용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말에는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전 8시 30분경이었는데 24시간 운영되는 동안 서로 말 한 마디 주고받지 못한 채 저마다의 시간을 할애해 욕탕에 몸을 담갔다가 물기를 훌훌 털어내고 떠날 손님들이 이 규칙을 어떻게 지켜나갈지 문득 궁금해졌다. 수중 모터의 역할은 물을 정화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른들에게는 그 쓰임이 다른 걸로 보았을 때 의구심은 더욱 증폭됐다. 아니나 다를까. 1시간쯤 넘어서 등장한 아주머니 한 분이 그 문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아래쪽에 버젓이 앉아 모터를 작동시키는 스위치를 눌렀다. 이내 모터가 멎자 아주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스위치를 한 번 더 눌렀다. 오늘 하루의 제한된 횟수가 벌써 2회나 소진됐다. 앞으로 올 손님들을 이러한 사실을 알기나 할까. 아주머니는 앞으로 올 다른 손님들을 생각해보기나 했을까, 아니 저 문구를 제대로 읽기는 했을까. 앞으로 올 사람들역시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 있겠지.
이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 나는 어긋난 개인주의에서 번져나간 이기를 본다.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해 옆 사람을 밀치고 지하철을 나서는 사람들, 세일 소식이 알려지면 필요한지 또는 충분한 양만 담았는지 괘념치 않고 사재기 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비슷하다.
물론 중장년층의 이기와 주 사회활동 계층인 20-30대의 이기와 청소년들의 이기는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특히 중장년층의 이기에는 대체로 제 밥그릇 챙기기에도 급급했던 시절이 드러나는 반면 30대 이하로 갈수록 극심하게 나타나는 이기는 풍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분배를 개의치 않고 마음껏 그리고 멋대로 취하는 형태다.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이 타인을 지운 사람들과 '그럴 필요가 있냐'며 타인을 잊은 사람들이 뒤섞인 대환장 파티다. 모든 세대가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이 경계가 허물어지며 온갖 이기를 자행하는 경우도 본다. 나쁜 것이란 자라나면 더 자라나지 줄어들지는 않는 법이라 새로운 이기를 학습한 사람들은 이기로 똘똘 뭉친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고는 간단히 이 변화나 세태를 요약한다, '개인주의'. 대체 그 단어가 가진 정당성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장 완벽한 답인 양 내민다. 안타깝게도 타인에 대한 '무시'와 '외면'으로 얼룩진 개인주의란 없다. 타인이 없는 개인이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괘념치 않은 자신을 위한 욕망은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이기'로 진단해야 정확하다.
우리나라 사회가 '개인주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사회와 경제가 비교적 안정적인 단계에 들어서며 비로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20여 년 전쯤이 아닐까. 물론 IMF를 지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내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약 4년 만에 경제 회복을 이룬 2000년대는 배곯는 이들이 넘쳐났던 60-70년대에 비하면 풍족해졌다고 할 수 있다.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고, 교육열은 나날이 높아졌으며, 세계화는 한시가 바쁘게 이뤄졌다. 여유와 함께 시야가 넓어지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니 과거라면 그러려니 넘겨온 것들이 점차 당연하지만은 않아졌다. 일상적으로 자행되어온 지나친 간섭과 모욕적인 언행들이 서서히 부각되었다. 짐짓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학교와 가정에서도 존중이라곤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세대들이 '너 잘 되라고 하는 이야기'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내면을 헤집던 시절이었고, 불편함을 함부로 드러내지 못한 채 속앓이만 하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론 일상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문화가 쉽사리 뽑혀나갈리는 없었지만, 벗어나고자 하는 수많은 의지가 모이며 비교적 빠른 속도로 '개인주의'는 우리 문화에 스며들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생각보다 많은 대학에서 강제로 술을 먹이는 문화가 사라졌다. 이러한 추세는 한 해가 다르게 확산됐다. 놀라운 시도를 감행한 선배들이 그대로 직장으로 옮겨가고, 그러한 문화에 익숙해진 나와 같은 후배들이 직장에 들어가면서 '개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마저 흔들었다. 대체 어디까지가 개인의 영역인가는 지금도 난제지만, 당시에 그 난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변화와 발전은 이뤄지고 있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 서른 살이 넘고 얼추 중간관리자에 가까워지고 있는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조심스러운 분위기 안에 지시와 권유와 질문이 오간다. 물론 내가 운 좋게 예의와 배려가 있는 회사에, 부서에 당첨된 지도 모른다. 혹은 '라떼는~'을 시전하는 상전들을 비교적 잘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폭군처럼 구는 단체의 수장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려오고, 나 역시 거래처를 상대할 때는 '갑질'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조금 더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표해도 '괜찮은' 분위기 안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가끔은 부딪히고 차라리 서로를 무시해버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무서운 속도로 '개인'이라는 목표에 사회를 몰아넣기 시작한다. 당최 사회라는 집단이 개인이라는 객체에 흡수될 수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집단의 '집'만 언급해도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흘기는가 하면, 경악하고 '꼰대'라는 말로 압축해버린다. 이런 편협한 마음과 태도가 과연 그들이 말하는 꼰대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잘못된 것이 명백한 사상이나 신념을 뒤짚으려 할 때 큰 목소리와 강경한 태도가 필요하기는 하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중요한 사건들 대개는 시위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 덕분에 끝내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공동체 주의의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에 나서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공동체 주의의 모든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실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다. 현대 사회가 내세우는 '능력주의' 때문에 개인의 노력만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집을 나설 때부터 매순간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버스 기사, 식당 주인, 통신업체 직원들, 환경미화원, 엘리베이터 또는 에스컬레이터 수리업체, 마트나 편의점 직원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일상이 평소처럼 굴러갈 수 있도록 돕는다. 공동체 주의는 그러한 연대의 중요성이 잊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근간이다. 개인의 존엄을 위해 결집하고 단합하는 과정 또한 '개인'이 형성한 '집단'이 하는 일이지 않나. '개인'보다 함께일 때 해낼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집단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개인주의의 극단에 서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으로 할 때 발생하는 피해를 막고, 개인주의 이점을 접목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집단주의의 문제점만 털어내려다가 이를 완전히 떨궈버리고 개인주의의 광신도로 돌아서고 말았다. 개인주의라는 것이 애초에 개인'만' 위하는 것이라고 누구도 정의한 적이 없는데, 그러한 착각 하에 개인의 이득을 위해 또 다른 개인의 이득을 갈취하고 있는 형색이다. 소위 '개인을 (집단보다) 우선시'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주의의 종주국도 인정하지 않는 비틀어진 개인주의일 뿐더러 집단주의가 주는 피해나 상처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개인주의도 집단주의 못지 않게 처단해야 할 사회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릭 와이너의 책 <행복의 지도>를 읽으면 행복도가 높은 나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개인의 욕망보다는 집단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 작은 인구가 함께 살아가 서로서로 속속들이 아는 것에 피로를 느낄 때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뢰가 깊다는 점이었다. 개인의 욕망이 점철될수록 사회가 더욱 각박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느끼고 있다. 욕망은 신뢰와 등지고 의심, 경계와 나란히 성장하기 때문이리라.
애초에 개인주의에 우리가 목말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떠올려본다. 우리는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자기확신이 생기고 삶의 만족감을 키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 말인즉 타인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존중받고 싶어 한다. 개인이 중요한 만큼 타인도 중요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겠다고 차라리 선을 긋고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이것은 개인주의라 할 수 있을까? 그건 단지 두려움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포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인 존중이 중요하다는 걸 자각은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두려움', 그래서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 피로하다는 데서 오는 '게으름'. 그렇게 포기하고 방관하는 자세 역시 개인주의에 편입되긴 어렵다.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겠다. 사람들과 항상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 점을 기억하면 절대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함께 살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서로의 눈치를 봐야 한다. 눈치로 배려나 통찰력도 기를 수 있으니 나쁘다고만 생각할 것도 없다. 단지 눈치'만' 보며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해야 한다. 개인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대화를 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대화가 가능해질 때 '협의'는 '타협'으로 순조롭게 이어진다. 우리는 자꾸 '함께'하는 것을 잊고, '타인'을 잊기 때문에 '타협'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그러니 갈등은 심화되고 점점 더 개인화되는 악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 부디 멀어지지 말자. 바로 옆에 당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 당신을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하고 있는 사람, 당신이 속한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자. 그들과 눈을 맞추고 때로는 손도 맞잡아주자.
지난해 여름, 친한 회사 동료들과 약속을 잡으려다 보니 시간이 맞는 날이 내 생일즈음밖에 없어서 생일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내 생일 날짜를 몰래 공유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래서 졸지에 깜짝파티를 받았다. 큼지막한 케이크를 사와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테이블이 고작 다섯 개쯤 되는 작은 식당에 예약하고 갔던 터라 식사하러 온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이럴 때 소란스러움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려 케이크를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과 나눠먹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술 기운이 올랐고, 그런 훈훈한 정을 재현하고 싶은 맘이 들었다. 시대가 달라져서 사람들이 반길지, 특히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염려가 되었지만, 항상 내 흥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동료 한 분이 내 말을 듣자마자 고민할 겨를도 없이 단행하셨다. 나누다 보니 케이크 조각이 크지 않아 막상 테이블에 가져다드릴 때 조금 민망한 마음도 들었는데, 하나같이 해사한 얼굴로 고마움을 표현해주셔서 모든 걱정과 염려와 민망함이 녹아내렸다. 심지어는 마침 좋은 와인을 챙겨왔다며 생일자인 내게 한 잔 나눠주신 테이블도 있었다.
그날 나는 그 어떤 생일날보다도 행복했다. 함께하고 나눌 때 배가되는 기쁨을 오롯이 체감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