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사람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있어 상실의 치유는 지혜의 성찰을 반복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불과 몇 년 전, 상실의 터널에서 지난날, 길을 잃고 헤매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스스로에게 그동안 참 많이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후 나는 카세트테이프 외에도 아빠가 남긴 모든 유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추억에 젖어드는 것이 두려워 미루고 미뤘지만, 이제는 우리의 지난날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에는 기억과 감정이 저장된다는 말을 나는 믿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특정 물건으로 인해 한 사람을 추억하게 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라고.
우리 집 곳곳에도 아빠의 지난 생애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아빠가 즐겨 입던 짙은 베이지색 니트, 착용하던 안경, 너덜너덜한 일기장, 엄마와 함께 찍은 젊은 시절의 사진들, 오빠와 나에게 보낸 편지들, 내가 어릴 적 아빠에게 선물했던 서툴고 엉성한 그림엽서들. 이 모든 것들은 아빠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귀한 선물들이었다.
반면에 슬픈 기억이 서려있는 물건들도 있었다. 아빠가 투병 중에 사용하던 의료용품, 수술로 인해 치아가 좋지 않아 식사로 대체하던 음료, 유통기한이 지난 약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들은 아빠가 사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두었던 물건들이었다.
올바른 비움은 올바른 채움을 위한 신성한 의식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나날을 위해 불필요한 과거, 부정적인 과거는 정리하고, 아빠의 유품 가운데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물건들만을 남기기로.
엄마와 이 과정을 함께 했다. 우리는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일을 멈추고, 아빠와 함께 행복했던 지난날들을 간직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아빠가 남긴 의미 있는 흔적들은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채워줄 것이며 기꺼이 슬픔이 비워진 자리에는 더 좋은 에너지가 채워질 거라 믿었다.
버리면 사라지는 물건과 달리 마음에 남은 흔적은 영원하다.
때로 지치고 힘든 날이 오면, 나는 아빠를 떠올리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일을 성취하여 기쁠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도 아빠일 것이다.
마음에 있다는 것은 그토록 특별한 것이다. 삶의 어느 순간이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껏 가벼운 기분을 느꼈다.
상실의 터널, 그 깊은 어둠 속을 나와 다시 마주한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