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엔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명품백 하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표지 사진 : Ceci n'est pas un Delvaux (이것은 Delvaux가 아니다)라고 적힌 - 마그리트의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영감을 받은 - Delvaux의 가방)
다음 중 전형적인 파리지엔의 백을 고르시오
1) 프랑스 브랜드의 시그니쳐 백
2)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명품백
3) 국적 불문 유명 브랜드 백
4) 미니백
5) 캔버스백
6) 미니백과 캔버스백
위의 보기를 한국의 직장인으로 한정하면 3번 일 듯한데 파리는 2번과 5번에 더 가깝다.
2)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명품백
파리는 백을 선택하는 기준이 한국과는 약간 다르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상 지나친 돈자랑을 터부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근히 드러낼 수 있는 아이템을 주로 산다.
몇 주 전 옆자리 영업과장님은 1년 전부터 노래 부르던 샤넬백을 사러 간다고 한껏 들떠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한국이나 프랑스나 가방을 사도 조용히 메고 오기 마련일 텐데 그녀는 모로코 출신이어서 그런지 영업인이어서 그런지 목소리도 크고 자기주장도 강한지라 전 직원이 그녀의 샤넬백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료 직원의 건너 건너 아는 사람에게 특별 할인을 받아서 결국 꿈에 그리던 2.55를 사게 되었고 자랑스레 가방을 메고 와 모두에게 자랑하였다. 여기서 포인트는, 나였으면 사실 로고가 박힌 클래식을 샀을 텐데 그녀는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2.55를 산 것이다.
여기서 무릎을 탁 쳤다. 돌이켜보니 다른 이들의 가방들도 그랬던 것 같다.
팀 내 다른 과장님도 입생로랑 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금장도 은장도 아닌 그냥 양각으로 Y가 살짝 도드라진 쇼퍼백이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입생로랑인지 모를 뻔했다. 또 길가에서 마주치는 여자들도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셀린느 백이나 지방시 백을 메는 것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프랑스 브랜드의 시그니처 백 (지방시 판도라, 셀린 러기지 백 등)은 의외로 찾아보기가 힘들며 비 프랑스산 브랜드의 백은 더더욱 구경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펜디와 프라다가 드물다)
내가 느낀 파리지엔들은 의외로 가방에 너무 쿨했다.
구두는 크리스천 루부탱을 부르짖으면서도 가방은 이름 없는 가죽 수제 가방이든 캔버스 백이든 신경 안 쓰고 자유롭게 메고 다닌다. 백팩을 메고 출근하는 일도 잦다. (고백컨데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등산을 제외하곤 메본 적이 없다.) 한 번은 그 호피무늬 재킷의 부장님이 엄청 예쁜 보라색 스웨이드 가방을 메고 왔길래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더니 예상치도 못하게 '아메리칸 어패럴'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녀 역시 로고가 두드러지는 백을 메는 것은 한 번도 못 봤다.
또한 나에게(동양 여자)에게 파리지엔의 패션을 설파하기를 좋아하는 자매결연 자선단체 여회장님은, 파리지엔은 늘 믹스매치를 즐겨한다며 일장 연설을 하신다. 동양인들은 참 예쁘게 입는데 너무 풀셋으로 입는다며 힘을 빼야 진정한 파리지엔 스타일이라며 어찌나 강조를 하던지. 그분도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샤넬백을 들지 않는다.
6) 미니백과 캔버스백
가장 전형적인 파리지엔의 출퇴근 가방 스타일링은 다음과 같다.
크로스 미니백과 서류 및 도시락이 든 캔버스 백.
캔버스 백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읽기 전에는 한국에서처럼 브랜드 쇼핑백에 잡동사니를 넣고 다녔다. (쇼핑백도 백에 준하는 취급을 받아 예쁜 브랜드 쇼핑백'만' 구매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그런데 한 번은 도시락을 피에르 에르메 쇼핑백에 넣어갔더니 사람들이 마카롱 사 왔냐고 백이면 백 물어보았다.
여기서는 무조건 캔버스백이다.
쇼퍼백을 메는 경우도 있으나 그만큼 흔한 게 위와 같은 스타일링이다.
달리 말하면, 파리는 소매치기가 많기 때문에 귀중품은 훔쳐가기 어렵게 미니 크로스백에 넣고 나머지 물품은 한쪽 어깨에 캔버스 백을 메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의 '2)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명품백'도 해석이 가능하다. 대놓고 '나 명품이오' 하는 백들은 '훔쳐가시오'로 해석하는 소매치기들이니까.
이는 흡사 미니백과 전공 도서가 든 플라스틱 가방을 따로 들고 다니던 여대생들과 같다. 그와 같은 방식은 대학교 때나 지금이나 비효율 적이라고 느낀 나는 한동안은 캔버스 백에 모든 걸 담아서 넣고 다녔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캔버스 백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동료가 지하철에서 캔버스 백을 날치기당해서 교통카드와 잠옷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나마 가방을 분산시켰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마는 그래도 절대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그런 관계로 요즘은 귀중품은 작은 가방에 넣고 다니고 나머지 것들은 캔버스 백에 넣고 다닌다. 게다가 시기적절하게도 딱 소지품만 들어가는 귀여운 가방을 선물 받아서 파리를 떠나기 전까진 계속 이렇게 다닐 듯하다.
두번째 브런치 메인 선정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파리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글 쓸 에너지가 더욱 나는 것 같아요 :)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는 "파리에서 한국 낯설게 보기"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