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로맨티스트 더스틴>

I mean, hopelessly romantic

by 예나

더스틴은 프로필에 아무 글도 쓰지 않고 사진만 몇 개 떡 올려놓는 스타일이었다.

데이팅 앱에서 이런 프로필을 보면 나는 무조건 왼쪽으로 던진다.

글 한자 쓸 노력도 안 하면서 무슨 데이트를 하겠다는 것이며,

순전히 외모만 보고 자신을 평가하라는 태도 또한 자만심 또는 게으름으로 읽혀 나에겐 매력이 없다.


하지만 나에겐 할 숙제가 있었고...

워낙 드물게 프로필들을 오른쪽으로 넘기는 바람에 숙제 마감 기한이었던 2주도 진직 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더스틴은 잘생겼더라.

글 한자 없었지만, 미친놈은 아니길 바라며 나는 오른쪽으로 그를 넘겼고, 매칭이 됐다.


이야기를 해보니 특별히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번 만나보기로 했는데, 그는 이상하게 시간에 민감했다.

데이트하기로 한 날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다음 날이나 다음 주말에 만나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안된다는 식으로. 보통은 첫 데이트 시간을 바꾸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는데.

이유를 말하지도 않더라.

그래서 그냥 급한 일을 해결하고 그럼 좀 늦게 보자고 했다.

더스틴은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첫 데이트 때 두 시간도 함께 있지 못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도 한국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귀국하는 날 나와 첫 데이트를 했던 것이었다.

더스틴은 참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날 출국이라는 걸 알려줬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는 일을 옮기거나 해봤을 텐데, 그 말조차 만날 때까지 하지 않았으니

더스틴은 따지고 보면 전형적으로(?)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할만한 배우상.

그리고 일본에서 교수를 하는 사람이었다.

똑똑하고, 차분하고, 따뜻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나 차분했냐면, 그 사람 앞에서 나는 ADHD 걸린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평소 정말 차분한 사람인데, 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말이 없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내가 마음에 들기는 했는지, 어땠는지도 알 수 없었다.

워낙 감정 표현을 조심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어쨌든 이전에 말했던, '생각했던 것과 느낌이 달라 실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필립은 딱 내 스타일대로 생긴 사람이라 강렬하게 끌렸다면, 더스틴은 그냥 잘생긴 사람이라 보기 좋고 끌리더라.(외모지상주의자;)

하지만 워낙 데이트 때 조용해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에 사는 사람이었고, 일이나 사는 곳을 옮길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2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잠깐 만난 것 가지고 뭔가 대단한 감정이나 기대가 생기긴 어렵다.

필립과는 2년간 대화한 시간이 있었고, 그래도 반나절 내내 같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좀 달랐다.


그렇지만 나는,

이전에도 말했듯이,

플러팅을 잘하는 사람이다.


일본으로 돌아가자마자 더스틴은 나에게 잘 도착했다고 연락했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더스틴, 오늘 데이트에서 너에게 키스하지 않은 걸 후회해. 두 번째 데이트까지 기다려야 하겠지. 아마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하겠지만."

근데 이 문자에 더스틴이 사랑에 빠진 것 같다. ㅎㅎ


워낙 조용한 사람이고, 나이도 30대 후반으로 많고, 대학 교수라는 직책도 있어서 나는 이 사람이 이렇게 금방 누군가에게 빠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진심이긴 했지만, 무슨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었는데, 더스틴은 그날부터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 같다.


내 문자를 너무 좋아하더니, 자기도 아쉽다며. 금방 만나자며 마음 졸여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생활 습관과 가치관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냐며.

내 나이쯤 되면 꽤 자주 듣는 질문이기도 해서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내가 해외에 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 그는 일본을 생각해 본 적은 없냐고 물었다.

나는 일본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했다. 네가 거기 있다는 건 좋을 수 있지만, 나는 유럽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조금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자기 인생은 일본에 있고, 자신은 한동안 유럽으로 갈 생각이 없다면서.

나는 이게, 22살 남자애가 결혼하자고 하는, 혹은 6살 때 유치원 친구랑 결혼하자고 약속하는,

그런 느낌의 가볍거나 현실성 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나도 농담 식으로 플러팅을 던졌다.

언제나 그랬듯이.(결혼 적령기를 바라보는 30대 여성들은 조심하길 바란다. 이런 실수 절대 하면 안 된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

그 대답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 누가 알았겠나..

겨우 한번, 1시간 반 데이트한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대화 시작한 지 2주도 안된 사이인데...


하지만, 분명 나는 더스틴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줄 몰랐을 때는 그의 그런 말들이 우리 둘 사이의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중에 언젠가 정말 진지해질 수도 있지만,

30대 어른이라면 현실적으로 첫 데이트 이후 그런 기대는 깊이 하지 않을 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니, 그냥 우리 사이에 긍정적인 긴장감과 재미를 줄 수 있는 요소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스틴은 그해 겨울, 자신의 고향인 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엄마에게 내 얘기를 했다.

그리고 한국에 관심이 생겼고, 어쩌면 한국인과 진지하게 만나고 결혼할 수도 있다고 말을 한 것 같다.

더스틴의 엄마는 아들의 말에 보답하며 그에게 한국과 관련된 책을 사주고 한국에 관심을 보였다.

그해 생일, 더스틴이 원해서 그들은 한국 음식점에서 파티를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한 것 같다.

너무 빠른데..?

좀 과한데..?


그래서, 다른 것보다 그냥 연락에 조금 뜸을 들이면 더스틴이 조금 진정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시차가 없는데 시차가 있는 것처럼 답장한 것이다.

문자 보자마자 답장하던 것을 두세 시간 텀을 두거나 그날 밤에 잘 자 인사하면서 답장하고 이야기하는 정도.

둘 다 할 일이 있는데, 그건 건강한 연락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확실히 말해두었다.

내가 생각해 보겠다고 하긴 했지만, 너도 아주 진지하게 물어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있었다고.

그냥, 꽁냥꽁냥하는데 '싫어'하기 싫어서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유럽에 가기 위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준비를 했고, 그 간절한 마음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고.

그는 이해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듣던 내 남동생은 '이미 신혼집에 둘 그릇 고르고 있을 애가 무슨 진정을 하겠냐'고 했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3년간 연락하고, 한 달간 마법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내가 다시 프라하에 계획을 하고 있다는 걸 모두 아는 상황에서도 필립과 나는 조심스러운데,

더스틴은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자신의 마음을 던질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더 '진심'인 걸까?

이런 사람이 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걸까?


필립은 너무나 조심스럽다.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기 싫어하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게 나에게는 다르게 다가와. 나는 솔직하고 싶지만 동시에 신중하고 싶어. 이걸 망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아직 서로에게 충실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아직 모르는데, 나도 그에게 그걸 강요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단 한 시간 반의 만남만으로 나와의 미래를 확신했던 더스틴보다 덜 로맨틱한 사람인 걸까?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나는 더스틴 같은 사람을 선택해야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더스틴은 지금 내 인생에 없다.

필립 이후 놀랍게도 꽤 마음에 든 사람이었는데.

몇 시간 답장을 늦추기 시작한 것이 그에게는 큰 불안이 되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한 시간 반의 데이트가 다였다. 이후 몇 달간 연락을 이어가긴 했지만..

내 마음이 떠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원래 대단~크진 않았는데.. 첫 데이트 이후 보냈던 저 문자가 엄청난 사랑 고백이라고 느꼈던 걸까.) 더스틴은 조급해졌다.

그리고 결국 그 조급함 때문에 나에게 어떤 실수를 했고, 나는 그걸 넘어갈 수 없었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나에게는 거의 성범죄에 가까운 실수였기 때문에.

너무 불쾌하고 기분이 안 좋아진 상태로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우리 단 한번, 딱 한 시간 반 동안 만난 사이잖아. 그 잠깐의 기억만으로 뭔가 대단한 관계를 기대하기에는 우리 둘 다 너무 나이가 많지 않아?"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차가웠던 것 같다.

저 때는 나도 나의 사생활이 크게 침해된 듯한 불쾌한 감정이 커서 저렇게 말했다.


나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짧은 인연만으로 뭔가 대단한 관계를 기대하기에 우리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다.

인도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그 이후에 사랑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산다.

운명적 상대가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성숙함과 상대의 성숙함 비슷한 수준일 때, 서로 인내하고, 한번 더 용서하고, 매일 아침, 매일 밤 그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까.

60대에게도 첫 데이트는 찾아올 수 있고,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평생 남을 기억, 평생 남을 사람이라는 느낌이 오기도 한다.

로맨틱한 사람은 자신을 그 순간의 느낌에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본능과 감정에 순간적으로 자신을 던질 만큼 로맨틱하다.

3년 동안 내 인생에 있던 사람이지만, 필립과 나는 겨우 한 달을 만났다.

하지만 더스틴과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결혼 이야기를 농담처럼 한다. 여느 연인이 그렇듯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마음속 깊이, 우리가 언젠가 정말 다시 만나 함께하지 않을까 하는 확신이 생기고 있다면,

나도 더스틴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적어도

나도 더스틴만큼 대책 없이 로맨틱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6개월+의 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