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다른 데이트도 하면서
(잠시 다른 남자 이야기하는 글)
필립과는 열흘 이상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일본에서의 만남 이전 몇 달간 연락을 안 하기도 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딱 한번 만난 사이에 또다시 채팅으로만 그렇게 어떤 마음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약간은 억지로 다른 데이트에 나갔다.
사실 나는 어떤 남자가 내 마음속에 있으면 다른 남자 생각은 1도 안 난다.
집중이 안되니까.
만약 모노가미(일부일처)가 선천적인 기질이라면,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내 친구들의 생각은 달랐다.
말도 안 되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 때문에 내가 데이트를 멈춘 걸 용납하지 않았다.
원래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고 일을 바쁘게 하는 사람이라서 자주 데이트를 하지도 않기 때문에,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친구들은 나에게 거의 숙제를 내줬다.
"앞으로 2주 동안 최소 5명이랑 첫 데이트해."
그래서 약 한 달간 마지못해 숙제하듯 나간 데이트가 다섯 개 있었다.
모두 별로였다.
아니, 대부분 괜찮았는데, 필립에게 느낀 것 같이 강렬한 끌림은 없었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었다면, 나는 무조건 그와 두 번째, 세 번째 데이트를 했을 것이다.
그도 그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닌, 현실일 수 없는 것에 목매일 필요 없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데이트에 나간 것이다.
다 고만고만 괜찮았는데, 그중 정말 기억에 남는 사람이 둘 있어서 그 둘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하나는 좋은 기억 하나는 이상한 기억.
이상한 기억부터.
참...
세상 황당한 데이트였다.
이 남자는 폴란드 사람인데, 호주에서 10년 넘게 살았다고 한다.
여자친구와 함께.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만 결국 1년쯤 전 헤어졌고, 지금 자신은 쉼이 필요해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근데 이 사람, 나와 데이트하는 내내 반복한 말이 두 개 있다.
"모든 남자들은 무조건 더 어리고 새로운 여자를 원할 거야. 결혼을 했든, 여자 친구가 있든 상관없이."
"그런데 바람은 여자가 더 많이 피워. 남자는 그런 마음만 들지 더 충실한 쪽이거든."
?????
왓더?
....
어쩌라고...
왜 나한테, 첫 데이트에 이런 말을 하는가...
완전 아무런 근거 없는 나의 추측이지만, 오래 사귄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와 얘의 이런 확고한 생각과 최근 굉장히 열정적으로 운동하게 된 이야기 등을 듣고 있자니 그럴듯한 가설이 생겨서 나는 몰래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전 여자 친구가 바람 폈구나.. 그래서 헤어졌고, 지금 그 상처를 극복하느라 저런 말을 반복하나 보다.
그렇다면, 뭐 이해는 한다.
하지만 내가 물을 말은 아니라서 물어보지 않았고, 저건 완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첫 데이트에서 나에게 저런 말을 적극적으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
자기도 남자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 아닌가?
그래서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건 좀 얘기를 해야겠다 싶어서 1시간 만에 끝날 수 있는 첫 데이트를 네다섯 시간 동안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열정적인 토론만 했다.
"너의 그 말은 남자를 비하하는 말이야. 나는 가정과 여자친구에게 충실한 좋은 남자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 사람들이 몰래 그런 생각과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어. 너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모든 남자'라는 말을 붙이면서 쓸데없이 그 사람들을 모멸하지 마."
하지만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게 '진화생물학적인 사실'이라면서.
당시 내가 생물학을 공부하고 있고 진화생물학 연구실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나도 초보적인 수준인데 괜히 으스대는 것 같을까 봐.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생물학까지 운운하니 역겨웠다.
더 황당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데이트가 끝나는 순간, 그는 나에게 자기 호텔 방으로 오지 않겠냐고 '초대'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면서.
속으로 온갖 욕이 쏟아져 나왔지만 참았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까지 네 시간 동안 모든 남자는 새롭고 더 어린 여자를 어쩌고 저쩌고 해 놓고 나한테 왜?
나 서른세 살이야.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집에 와서 귀를 벅벅 씻고 잤다.
그런데 그다음 날 그에게서 문자가 와 있는 게 아닌가.
"솔직하게 말해줘. 어제 데이트 어땠어?"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이 안쓰러운 남성은, 어제의 토론이 어떤 열정적인 끌림의 증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라니 말할게. 굉장히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어. 너는 대화 내내 너무 이상할 정도로 고집이 셌고, 내 입장은 전혀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남성들에 대한 황당한 가설만 늘어놓으면서 대화를 질질 끌었어. 금방 끝나고 넘어갈 수 있는 대화를 4시간 동안 하느라 우리는 첫 데이트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지도 못했잖아. 너의 이상한 고집 때문에.. 다른 것 다 차치하고, 나는 너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랑은 만날 수 없어. '모든 남자들은 언제나 더 어리고 새로운 여자를 원한다.'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겠어? 충분히 자존감이 높은 나 같은 사람이라도 너랑 사귀면 아마 '저 사람은 나와 만나는 지금도 다른 새로운, 더 어린 여자를 원하고 있겠지.'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그리고 너는 항상 내가 바람피울 거라고 의심할 거고. 왜냐하면 너의 말에 따르면 '여자가 더 바람을 많이 피우는 쪽'이니까"
이 안쓰럽고 감이 1도 없는 남성은 정말 내 답변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자신이 한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 내 믿음이 그럴지라도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건 아니라고.
그 이후 그날 저녁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이 했던 말을 취소하고 나의 마음을 바꾸게 하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의 가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상처 때문에 이렇게 발악하는 사람과 만날 수는 없으니까.
여섯 시간을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징징대던 걸 듣다 지친 나는 결국 필립 이야기를 했고, 그제야 그는 포기했다.
그 대화가 얼마나 황당했으면 나는 그를 언매치 하기 전에 대화 기록을 PDF로 뽑아서 간직해 뒀다.
친구들이랑 동생한테 보여주려고.
나중에는 우스운 기억이 될 것 같아서.
세상에는 상처받은 남자들이 정말 많다.
너무나 섬세하고, 예민하고, 감정적이고, 연약하고, 외로운 남성들이 많다.
내가 자주 보는 심리학자 팟캐스트가 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현대 남성의 외로움은 팬데믹 현상이다."
라고.
그 말이 내가 보기엔 꽤 사실이다.
그는 자신도 한때 그런 외로움과 싸웠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인셀'이었다며 스스로를 내리는 방식으로 다른 남성들의 공감과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여성의 거절과, 데이트 하나 제대로 잡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남성들이 느끼는 좌절감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알려준다.
명상에 대해 찾다가 알게 된 사람인데 전공은 따로 있었다.
어쨌든, 이런 데이트만 하면서 나는 6개월을 보냈다.
나는 그저 필립만 생각했다.
빨리 내년 봄이 와서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더스틴을 만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