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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 뒤로 하고>

마음 누르기

by 예나

그날 오후 일찍 만나 거의 자정까지 같이 있었는데, 아쉬웠다.

그는 같이 자고 내일 아침에 헤어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워낙 혼자 자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서.

우리는 내가 머물던 호스텔까지 한 시간 정도 같이 걸어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늦게 먹은 초밥이 좀 힘들어서 내가 좀 걸어야겠다고 했다.


그날 우리가 했던 작별인사는 정말 다시 보지 못할 사람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나에게 자신은 롱디는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기억하라는 듯이.

나도 롱디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끌리지만,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며.

그렇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오후 비행기였기 때문에 남은 관광을 했고, 그는 아침 비행기라 일찍 호텔을 나왔는데, 갑자기 그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굉장히 짜증이 난 말투로.

"믿을 수가 없네. 역을 잘못 찾아가서 기차를 놓쳤어. 바로 다음 거 타면 될 것 같긴 한데 티켓이 없어."

나는 놀라서 물어봤다.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거야?"

그가 답했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 순간 내 마음이 어땠을까?

그가 비행기를 놓치길 바랐을까?

그럼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는 속상했겠지만.


그랬다.

아주 잠깐은.

그가 만약 비행기를 무사히 탄다면, 나의 마음속에 약간의 아쉬움도 없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바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일단 오는 기차를 타고, 앱으로 티켓 구매해서 혹시 누가 물어봐도 문제없도록 해. 괜찮아. 비행기 안 놓칠 거야."



그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다는 확인을 하고 나서야 나는 말했다.

"만약 네가 비행기를 놓쳤다면 너를 한번 더 볼 수 있었을 테니 솔직히 좀 아쉬운 마음이야. 하지만 네가 비행기를 놓치지 않아서 기뻐."

그리고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다는 확인을 하고 나서야 그는 말했다.

"내가 기쁜가? 잘 모르겠어."

자기도 아쉽다는 듯이.


그냥 하는 말들일 것이다.

나도, 그도.

하지만 그 순간, 욕심부리고 싶은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 나를 누르지 않게 둔 것이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이 커지도록 뒀다면 "네가 비행기를 놓치면 좋겠어."라는 농담으로 다급한 그를 더 불편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그 순간 그를 안심시키려는 말과 조언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때 내가 선택한 마음과 행동이 필립을 진정시켰던 것 같다.

필립이 고마워하는 마음이 핸드폰을 넘어서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그때부터 필립은 나와 이야기할 때마다, 나를 볼 때마다 한 번씩 말하고는 했다.

"난 그게 너무 좋아. 너는 언제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 너는 정말 어른스럽고 현명해. 너랑 이야기하면 나는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야."

사실은 내가 어렵게 마음을 누르고 고민한 뒤 선택하는 말과 행동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우정이든 사랑이든 가족이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인내심인 것 같다.

약간의 숨 쉴 시간만 나에게 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악의 없는 실수에 대한 용서를 한번 더 하기 쉬워진다.

내가 그런 친절과 관용을 보이면, 상대도 부족한 나를 한번 더 용서해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14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엉뚱하고 황당하고 귀여운 헛소리들을 들어오면서 나는 인내와 친절과 용서와 사과를 체화하듯 배웠다.

그들을 인내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에게 인내와 친절과 용서와 사과를 가르친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해내니까.

부족한 어른들을 매일같이 용서하니까.


필립이 나의 '어른스럽고 차분한' 모습을 좋아하고 그걸 표현할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왔던 인생과 내가 선택한 직업에 감사했다.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줬고, 나의 이런 모습을 스스로 목격하고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나도 그에게 그런 느낌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취가 아니라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좋다는 마음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프라하에 있는 동안, 거의 내내 함께 지내면서 나는 최대한 자주 따뜻한 말을 해주려고 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다른 게 아니라 너의 모습이 그 자체로 좋다고.

하지만 나는 말 이상의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고, 그래서 답답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게 상대에게 '보답의 부담'을 던지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전달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알 수 없다.


내 인생의 99%의 남자는 주말 오후 카페에서 길어야 서너 시간의 첫 데이트 만으로 끝난 인연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연애를 1도 모른다.

그와는 정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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