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 끝났을 수도 있었던
카페까지 가는 동안 그는 우리가 왜 지금까지 한 번도 통화를 안 했는지 안타까워하며 걸었다.
나는 통화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게 왜 지금 와서 그렇게나 안타까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지도를 잘 못 보는 사람이고, 그는 지도만 있으면 길을 잘 찾는 사람이다.
나는 무임승차하듯 그냥 그가 가는 대로 따라 걸었다.
카페도 그가 정했고 길도 그가 가는 대로 그냥 따라갔다.
조그만 카페에는 딱 우리 둘만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필립에 대해 꽤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더라.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최근 어떤 일을 겪었고..
왜 인지 모르게 나는 입이 잘 안 떨어졌다.
말은 많이 했지만, 나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게 괜히 힘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사람과의 인연이 그날,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필립은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사라지도록 놔두지 않았고, 나도 그날 이후 좀 더 자주, 적극적으로 연락했다.
그날의 모든 것이 기억난다.
어떤 말을 하면서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는지, 어떤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는지,
나와 35cm 키차이가 나지만, 내가 그를 보지 않을 때, 저 높이 그의 눈이 나를 어떻게 봤는지도 나는 기억이 난다.
너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그의 목소리와 미소와 말투와 몸에서 나는 향기도 어쩌면, 내가 생각한 대로였다.
아니면 그렇다고 마음을 먹었든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데이팅 앱 10년+ 역사상 처음으로.
나는 습관적으로 데이트 상대를 차단하는 사람이다.
흔히 고스팅(ghosting)이라고 하는... 모두가 싫어하는 그 행동. 나는 전문적으로(?) 한다.
지금까지 차단하거나 숨김 처리 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상대가 스토킹을 하거나 집착을 보여 그런 대응이 당연했던 경우도 있지만, 그냥 좋은 사람이지만 나랑 안 맞았던 경우라도 항상 그랬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런 별 의미 없는 연락처가 내 핸드폰에 남아있는 것이 번거로워서 그러는 것 같다.
필립은 그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행동이 굉장히 무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하는데?"
내가 물었다.
"상대방이 연락하는 게 싫으면 연락하지 말라고 얘기하면 되잖아."
그가 답했다.
"어차피 연락 안 하고 서로 잊게 되는 건 마찬가지인데, 굳이 말해서 상처 줄 이유는 뭐야? 그 사람들은 내가 차단한 줄도 몰라. 그냥 '내 연락을 안 보는구나'하다가 며칠 뒤에 날 잊어버릴걸?"
필립은 아니라고 했다. 그게 훨씬 더 무례한 거고, 말해주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 별 의미 없는 사람이라면, 차단한다'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내가 먼저 너와 연락을 끊는 일은 없을 거야."
그 말에 나는 겨우 이렇게 답했다.
"내 인생에 남아있을 사람이라면, 나도 연락을 끊거나 차단할 이유도 없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대체 저게 뭔 소린가 싶다.
하지만 나는 정말 확신했던 것 같다. 길게 이어질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인연이라고.
다음 날 아침 그는 자신의 고향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는 한국에서 당장 유럽으로 갈 일이 없었다.
지난 4년간, 한국을 뜨고 싶은데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내 인생에 별로 필요 없던 학사 학위를 따기로 했다.
석사를 가면 될 것 같아서. 학생 비자가 제일 쉬우니까.
마침 하고 싶었던 공부도 있었기 때문에 좋은 선택 같았다.
하지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아직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석사를 가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탈출의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유럽 3개월 여행을 계획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6개월 넘게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여행 때 다시 만난다고 해도, 나도 그도 그 시간을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날 나와 함께 있기 위해 친구와의 약속을 깼고, 그렇게 그와 8시간 정도 함께 있으면서, 어쩌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것 같다.
기대를 하기 싫은데, 새로운 인연의 설렘 앞에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지는 않는다.
그날 헤어지는 순간까지 나는 내 유럽 여행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내 성격상 다른 때라면 아무 부담 없이 "나 내년에 유럽 가. 그때 시간 내서 나 만나줘."라고 애교 있게 말했을 스타일인데.
나는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 마음의 이유를 정확히 글로 옮길 수가 없다.
그러니 필립 입장에서는 나는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냥 하루 짧고 강렬한 만남으로 끝날 수 있는.
그걸 생각하면 그날 이후 왜 그렇게 당연하게 자주 연락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몇 달간을.
결국 나는 유럽 여행에 대해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그날을 달력에 적어두고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우리 둘 다 아직은 가벼운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