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쌓인 기대가 있는데
추적추적 비가 오는 오후였다.
가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비가 와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도쿄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큰 느낌이었다.
물론 한동안 보이콧이 난리여서 7년 만에 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자주, 몇 번 왔는데도 새롭더라.
이번 일본 여행은 목적이 전과 달라서 그랬을까?
그래도 5시간이나 걸었던 것 같다. 우산을 들고, 빗소리를 들으며.
먹고 싶었던 것들 먹고, 어떤 사람일까 기대와 걱정을 하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재미있게 얘기도 하고, 그간 못 전했던 소식들도 전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는 걱정이 조금 있었다.
데이팅 앱에서 만난 사람들과 첫 데이트 이상 가지 못했던 대부분의 이유는 실망과 지루함이 컸다.
여자들만큼이나 남자들도 사진빨이 있다.
모두가 데이팅 앱에서는 물론 인생샷만 고르고 골라서 쓰기야 하겠지만,
특별히 사진보다 실물이 못나서 실망했다는 것보다는(그런 경우도 많았지만) 사진을 보고 채팅을 하며 느낀, 내가 생각한 그 사람만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게 달라서 실망하는 경우가 컸다.
남자는 어떤 여자를 볼 때 3초 안에 그 사람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가 결정 난다고 한다.
여자도 똑같다.
그리고 3초가 아니라 0.3초가 더 맞을 것이다.
이건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특히 데이팅 앱 시장에서 만나 첫 데이트를 할 때, 바로 느낌이 없으면, 보통 잘될 확률은 적다고 본다.
요즘에는 몇 번 더 만나며 서로에게 기회를 줄 만큼의 인내심도 없는 청년들이 많다.
바쁘고, 힘들고, 귀찮으니까.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나는 안경 쓴 사람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진은 다 마음에 안 드는데, 안경 쓴 사진 딱 하나 있던 게 마음에 들어서 매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화를 해보니 사람이 진짜 너무 웃기고 재밌더라.
첫 만남 전까지 며칠간 거의 매일 새벽까지 톡을 하면서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외적으로는 그 안경 쓴 사진 딱 하나 마음에 좀 들었던 정도지만, 그 유머에 너무 큰 매력을 느껴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첫 데이트 날 그는 안경을 안 쓰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쌓아왔던, 귀엽고 개구져보이던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다.
내 앞에서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모습이 별로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실망 그 자체였다.
알고 보니 몇 년 전 그 사람은 라식 수술을 했단다..
나는 농담하듯 "안경 쓴 그 사진 하나 때문에 스와이프 한 건데."라고 말하고, 장난스럽게 절망하는 표정을 그려내는 그 남자애를 보며 웃었다.
괜찮은 사람이었고, 나를 좋아해 줬고, 외모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냥 내가 생각한 그 이미지가 아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재촉하길래 두세 번 더 만났지만 전혀 마음이 안 가서 결국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좋은 사람을 차버릴 만큼, 평생 연애에 대한 배고픔이 크지 않았던 인생을 살아왔다.(개인적인 이유+선천적인 성격)
여하튼 그래서 나는 사진을 고를 때, 잘 나온 사진도 좋지만 정말 나의 성격과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을 고르려고 애쓴다.
과하게 웃어서 좀 마음에 안 든 사진이어도, 그게 평소 내 모습이라면 올린다.
그리고
누가 봐도 '20년 전 사진 올렸구먼' 혹은 '제일 잘 나온 사진에 어플 써서 올렸구먼' 하는 느낌이 드는 사진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것이라 예상하는 편이다.
차라리 더 못나게 나온 거 올리면 올렸지..
분명 실제로 만날 수도 있는 사람인데 사진에 거짓말해서 실망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의 경우 데이팅 앱의 가장 큰 단점이 그것이다.
첫 데이트 전 설레는 마음으로 채팅을 할 때에는 모두가 플러팅도 하고 최대한 서로 잘 보이려고 애쓰겠지.
절대 자신의 못난 모습을 먼저 보이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 자신의 진짜 모습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우선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나는 그걸 믿어버리는 사람이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필립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는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단단하게 고정되었을 것이다.
진지하고, 스마트하고, 젠틀한 이미지. 그렇지만 그 안에 약간 엉뚱하고 너드한 면이 있는, 큰 덩치에 안 맞게 귀여운 사람.
그를 만나기 전, 그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웃을지, 어떻게 걷고, 목소리는 어떨지까지도 상상해 버리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게다가 나는 이 사람과의 첫 데이트를 위해 어마어마한 투자를 한 셈이다.
단순히 시간과 돈을 생각한다면..
나의 기대를 하늘을 찌르고 있었을 것이다.
필립을 처음 만났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날씨와 분위기도 모두 기억이 난다.
아시아 여자애들이 가득한 그 공원 거리에서 그는 나를 바로 찾지 못했다.
나는 그를 바로 알아봤다.
조그만 사람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오른, 몸에는 약간은 날씨에 맞지 않는 듯한 셔츠와 얼굴에는 검은색 안경을 얹은 사람.
나는 슬그머니 그의 뒤로 가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며 인사했다.
"Hi"
그러자 그가 나를 보며 웃었다.
필립은, 내가 생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