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비포 선라이즈 찍고 와.”
내가 이 이야기를 모두 했을 때 내 동생이 했던 말이었다.
동생의 이 응원(?)이 내 결심에 큰 몫을 했다.
내가 워낙 남자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필립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그 정도 시도는 할만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이때쯤 가장 친한 친구가 일본 여행을 가기로 했고, 나한테 은근히 같이 갈지 물어본 일도 얼마 전에 있었다.
이것도 내 선택의 방향을 필립 쪽으로 비스듬히 움직이게 한 많은 우연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먼저 필립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만나러 일본에 간다면, 어떤 마음이겠느냐고.
필립은 너무 좋을 것 같다며(당연하지;),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자기 만나러 일본까지 날아오는 웬 여자애.
얼마나 오랜 안줏거리가 될 줄 잘 알고 있다.
필립 입장에서 싫을 리가 있을까.
내 입장에서도 그랬다.
걔 입장에서는 잊을 수 없는 첫 데이트가 될 텐데, 그렇게 기억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오랜 대화로 이 사람이 적어도 가짜이거나 위험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막연하고 무모한 확신이 있었다.
사실, 이번 3월 말에 시작한 유럽 여행에서 이탈리아에 잠시 일 때문에 머물다 프라하로 갔는데,
내 얼굴도 모르는 이탈리아 남자 두 명이 나를 보겠다고 프라하로 날아온 경험을 했다.
이탈리아는 일주일밖에 머물지 않았고, 일 때문에 간 것이었기 때문에 데이트를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 앱을 켰고, 남녀 할 것 없이 매칭이 되면 이야기하고, 갈 곳을 추천받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하던 중 두 남자가 뜬금없이 그렇게 결심했고,
내 목소리와 인스타까지 확인하고서는 나에게 프라하로 와도 되냐고 물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일본을 가는 것보다 더 쉬운 결정이었을 수는 있지만, 나처럼 친구와 같이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왕복 비행기와 숙소비를 생각하면 수십만 원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정말 오래 고민하고, 여러 번 확인하고 겨우겨우 오라고 허락한 기억이 있다.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스킨십도, 로맨틱한 마음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네가 확실히 알아야 돼. 나는 너랑 자고 싶은 마음도, 키스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런 마음이 드는 일은 내게 매우 매우 매우 드문 일이야. 너도 절대 예외는 아니야.“
나는 그 둘에게 “You don’t owe me anything.” “I’m not flying to Prague for a hook-up.” “Everybody knows that hook-up doesn’t need an airplane.”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은 뒤에야 안심을 하고 “그래. 그럼 와.”라고 했다.
필립은 내가 갈까? 하자마자 신나서 오라고 했다.
데이트에 대한 남녀의 시각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
어쨌든, 분명 필립의 인생에 기억에 남는 사건이 되겠지, 생각하며,
데이팅 앱을 사용하며 매칭되어 대화를 했던 수많은 남자들 중 유일하게 몇 년간 채팅을 유지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사람에게 그 정도 이야깃거리는 줄 수 있지 않나 생각하며,
나는 일본에 가기로 결정했다.
충동성이 없지 않았지만 가볍게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무조건 공공장소에서 대낮에만 최대 몇 시간 만나는 것이 온라인 데이팅 앱에서 비롯되는 첫 데이트의 상한선이었는데 그것을 한참 위로 뚫는 투자를 결심한 것이었고, 분명 지금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하게 위험하고 무모한 짓이었다.
나는 이번에 필립을 만나서 그 얘기를 여러 번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 같지 않냐고. ㅎㅎ
니 딸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첫만남을 위해 외국에 간다고 하면 너는 허락하겠냐고.
그리고 그렇게 간 일본에서 친구와 오랜만에 도쿄 관광도 하고,
마침 거기에 있던 또 다른 친구와 만나서 밥도 먹고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2024년 9월 28일 오후 2시 반,
드디어 나는 필립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