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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택이야>

그게 착각에서 비롯된 거라고 해도

by 예나

2년 전 첫 매칭 후 꽤 자주 꽤 오래 연락을 했지만, 몇 달간 연락이 뜸해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필립을 잊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앱의 존재 자체도 잊어버렸다.

이 앱은 며칠만 안 들어가도 알람을 잘 주지 않아서 이렇게 까먹기 참 좋은 앱이다.

나에겐 그게 도움이 되었고, 이 앱이 마음에 들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어차피 한 번씩 지루할 때 쓰던 앱이라 이렇게 자연스럽게 까먹으면 좋지, 바쁜데 끊임없이 알람이 오면 귀찮아서 알람을 껐다 켰다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이 앱은 일상이 바쁘지 않을 때만 한 번씩 생각나면 들어가는 스도쿠 게임 앱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러니 작년 가을, 많은 일로 바빠서 정신이 없는데 이 앱이 생각났던 건 나에게 이상한 일이었다.

괜히 앱을 켜서 한번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조용함도 지루함도 없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마음이 들었던 작년 9월 어느 주말 나는 그냥 그 마음을 무시하고 앱을 켜지 않았다.

필립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 상태라서 더 그랬다.

바쁠 때 매칭이며 채팅이며 신경 쓰는 것은 정말 번거로운 일이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주말 또 그 앱이 생각나는 거다.

이번에는 그냥 떠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꼭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뭔가 무시하기 싫은 충동 같은 느낌이라 당장 며칠 내로 끝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도 앱을 켰다.

그런데 오래되어 가려진 채팅창들 위로 딱 하나, 필립에게서 지난 주말, 연락이 와 있었다.

한국에 다시 왔다고, 나를 만나고 싶다고.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이제 이 앱을 쓰지 않는 거냐고,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그리고 내가 앱을 켰던 그날, 필립은 마지막 문자를 보내왔었다.

눈물 이모지 하나 ㅋ


하…..

뭐, 지난 몇 달간 까먹었던 존재이긴 하지만, 이렇게 연락을 받으니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2년을 기다렸는데 내가 필립을 만날 기회를 또 놓친 건가?

나는 당장 답장을 했고,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필립은 공항이었다.

이번에도… ㅎ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필립을 만날 기회를 내가 또 놓쳤다.


나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믿지만, 운명론이나 결정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 믿음은 지금 벌어지는 일에 너무 많은 감정적 투자를 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둘 다 몇 년간 대화를 하긴 했어도, 아직 한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마 필립도 여행하며 가볍게 앱을 사용하다가, 아 이런 애가 있었지, 하고 다시 문자를 보내본 게 아닐까 싶다.

나도 필립의 문자를 다시 받기 전까지는 얼굴도 이름도 까먹고 있던 존재였다.

그런데 하필 첫 데이트 기회를 두 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놓치고 나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내 뇌가 완전히 착각을 일으킨 느낌, 생각보다 더 특별한 것을 놓쳤다는 듯이.

그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게 아니라, 세상에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대단한 영적 현상이 아니라 이런 우연들이 겹쳐서 그 의미를 두껍게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나의 평소 믿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어떤 것이 나에게 운명이 되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우주적 힘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시할 수 있었던 사소한 우연들이 수없이 겹치는 바람에 그 일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게 부여된 의미는 나에게 원동력이 된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발짝 더 나아가고 한번 더 시도하게 하는 힘이 된다.

미술 공부를 선택한 것도,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은 것도, 우연히 시작한 교육자의 길을 14년간 이어온 것도 그런 우연이 겹쳐서이지 운명이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운명만큼이나 명확하고 큰 의미로 내 인생에 감사히 기록된다.


필립은 이번에 한국 여행을 마치고 체코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 여행을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는 공항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필립과 나 사이 있었던 이 우연들이 내 머릿속에 만들어냈을, 한껏 부풀려진 이 의미에 내 마음을 던지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남자와의 첫 만남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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