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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내야 했던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림>

서로의 목소리도 모르던 2년

by 예나

처음에 우리는 거의 매일 대화를 했다.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필립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필립이 나만큼이나 책을 좋아하거나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냥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1박 2일 여행을 가도 책은 꼭 챙기는 사람이고, 필립은 한 달 여행을 하면서도 책은 굳이 안 챙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필립은 똑똑하고, 자기 분야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과학 박사 학위가 있어서 내가 좋아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과학 분야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런 대화를 자주 하기도 했다.

나는 요리는 미국에서 살 때 필요해서 겨우 하던 사람이고, 필립은 요리와 베이킹을 취미 이상으로 좋아해서 책보다는 여행 때마다 그 나라의 칼을 비싼 값을 내더라도 주문 제작하는 사람이다.


매일 하던 대화는 일주일에 몇 번으로 바뀌고,

곧 1~2주에 한번 정도로 바뀌고,

몇 주에 한 번으로 바뀌고,

그렇게 서로 연락 없이 몇 달이 흐르기도 했다.

앱에서 그의 프로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를 완전히 잊고 지낸 여름도 있었다.

(연락이 없으면 나는 무조건 언매치를 하는데, 그걸 안 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의미가 큰 일이었고, 그가 특별했다는 증거였다.)


첫 만남이 있기 전에는 거의 5개월을 연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공항에서의 매칭 후 약 2년이 흐르고 다시 그가 한국에 왔을 때,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 연락을 나는 또 놓쳤다.

이 앱은 며칠만 안 켜도 알람을 제대로 주지 않는데, 몇 개월을 안 들어갔으니..


어쨌든, 우리는 매칭 후 그렇게 2년을 보냈다.

프로필에서 사진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서로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야말로 핸드폰 채팅만으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나는 내 프로필이 가짜 프로필처럼 보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매칭된 남자들 중 대부분이 나의 진짜 모습을 증명하기를 바랐다.

내가 필터를 잔뜩 씌운 사진을 썼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볼 땐 내 사진들이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데..

어쨌든 필립은 궁금하지 않았는지 그런 걸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그게 궁금하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그런 확인은 우리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필립은 자주 “왜 우리가 지난 몇 년간 대화하면서 한 번도 통화를 하지 않았을까? 왜 통화할 생각을 못했을까?”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처음에는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서 필립은 “우리 둘 다 온라인 데이팅에 익숙하지 않아서 물어볼 생각을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4월 프라하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가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내가 어떤 표정과 포즈로 다가왔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필립은 말했다.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 필립은 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날 나에게 빠진 어떤 순간이 있었다면, “Hi”라고 인사한 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때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였다고.

그 이후로도 통화를 할 때마다 필립은 내 목소리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한다.

사실 나는 내 목소리가 애교 없고 낮은 편이라고 생각되어서 항상 콤플렉스였는데. 그렇게 좋아하니 신기했다.


중요한 건, 서로 목소리도 모른 채 우리는 2년을 온라인 채팅만 하며 서로의 인생에 간간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후에 데이팅 앱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대화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한 번씩 나올 때면, 남자들은 모두 똑같이 반응했다.

“나는 죽어도 절대 못할 일이야.”

통화라도 해서 확인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더라도 만나지 않고 2년을 채팅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첫 만남 전까지, 다행히 우린 서로를 완전히 잊히게 두지 않았다.



그리고 2024년 9월 28일,

딱 하루,

약 8시간,

우리는 만났다.


그날 이후 올해 4월 다시 만날 때까지 6개월 하고도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그날 함께한 8시간은 6개월의 기다림을 그전 2년의 기다림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주었다.

나에게는 ‘어쩌면’으로, 필립에게는 ‘기꺼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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