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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지울 수 없는

by 예나

필립이랑 처음 매칭이 되었을 때 시간이 새벽 2~3시쯤 되었던 것 같다.

새벽 시간이라 첫 문자를 보내고 답장이 바로 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바로 답장이 왔고, 우리는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문득 이 친구가 왜 늦게까지 안 자고 있냐고 물었다.

당시 늦게까지 안 잤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는데, 개인적인 이유라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고, 나중에 만나면 얘기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러는 너는 왜 안 자고 있냐고 물었다.


필립은 몇 분 간 답장이 없다가 말했다.

“더 재미있는 답장을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지금 슬픈 현실 말고 다른 말이 안 떠오르네. 사실 나 지금 공항이야.”

필립은 한 달 정도의 한국 여행을 하다가, 한국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나와 매칭이 된 것이었다.


필립은 체코에서 태어나 평생을 프라하에 살던 사람이었다.

체코에서 오래전 한국인 여자친구를 만나며 한국 문화와 한국인들에게 사랑에 빠졌고,

이후 한국 음식과 문화에는 익숙하지만 필립에게 한국은 아직 생경한 타지이다.

거주지와 주 생활공간은 프라하이기 때문에 한국을 여행할 일이 많지 않은데, 개인적인 이유로 한 달 동안 긴 여행을 하게 되었고,

하필이면 프라하로 돌아가는 출국날 나와 매칭이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이때쯤 프라하 혹은 리스본에 가서 잠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던 때라서 필립의 프로필에 더 끌렸던 것도 있었다.

체코어를 조금 가르쳐주거나 체코 생활에 대해서 좀 배울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 계획을 나는 필립에게 2년간 숨겼다.

별로 알려야 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대화를 꾸준히 하고 나서 서로 마음이 생기고부터는 나의 계획이 나와의 관계에 부담을 주는 사실이 될까 봐 말하지 못했다.


어쨌든,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당장 만나야겠다거나 반드시 만나야겠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는데,

막상 만날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아쉽던지. 게다가 하루 차이로 놓쳤다니…


필립은 나에게 지금 프라하의 날씨가 우중충하고 흐리다고 했다. 우울한 프라하로 돌아가는 게 슬프다고 했다.

나는 그럼 우울한 프라하 버리고, 잠깐만 한국으로 돌아와 나를 만나고 돌아가라고 했다.

널 꼭 만나야겠으니까.

필립은 너무 그러고 싶다고 했다.

나를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모든 건 데이팅 앱에서 매칭이 되고, 대화를 시작하고, 약 30분 만에 이루어진 대화이다.

누가 봐도 우리는 둘 다 어렵지 않게 플러팅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필립이 마음에 들었고,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필립을 보내야 하는 게 진심으로 아쉬웠기 때문에 한 얘기였다.

나는 당장 프라하로 갈 계획이 없고, 필립도 금방 다시 이 먼 한국을 여행올 일은 없을 테니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테고,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니 이렇게 서로의 인생에서 지워질 확률이 훨씬 더 높을 테니까.


나는 필립에게

프라하로 돌아가서 우울한 너의 도시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다음 날, 프라하에서 회색빛 칙칙한 도시의 사진이 왔다.

트램과 강 근처 다리가 보이는 사진이었다.

이후 약 3년간, 서로를 기억하다, 잊어버리기도 하고, 궁금하다가 말기도 하면서 내 인생에 때때로 존재하던,

그리고 이번 유럽 여행에서 한 달을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함께한 필립이 나에게 보낸 첫 사진이었다.


지난 4월은 필립과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달이 되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필립이 3년 전 한국을 떠날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 사이에 지금 바다가 있다.

필립이 내 인생에 있었던 3년 정도의 기간 중 98%가 그랬다.

우리가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3년 중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느낌이 다르다.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을 적극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함께 하고 싶은 일을 리스트로 작성하고 있다.

보고 싶었던 영화와 가보고 싶었던 공간들을 서로 함께할 때까지 남겨두기로 했다.

함께하는 첫 경험으로 쌓기 위해서.


얼마나 가능성이 적고, 장애물이 많은 기대인지 우리 둘은 잘 알고 있다.

우리 둘 다 현실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한 달의 마법 같은 시간에 비례하는 만큼 충분히 설렐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서로의 인생에서 우리는 지워질 수 없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절대 지울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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